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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Jun 21. 2024

본격, 여름이 좋다!

  오늘은 6월21일, 하지다. 여름은 나에게 두 개로 나뉜다. 좋은 여름과 더 좋은 여름.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하지 전 더 좋은 여름이다. 여름이 좋은 이유는 먼저 낮이 좋기 때문이다. 나는 밤이 싫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밤이 싫었다. 깜깜한 데서는 무서운 게 튀어나올 것 같고, 모르는 게 숨어 있을 것 같으며 작은 기척에도 놀라게 된다. 날이라도 추워지면 더 최악이다. 그래서 해가 진 후 밖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퇴근을 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간다. 절대 재외출은 없다. 웬만하면 집에 꼭꼭 숨어있다.


   슬슬 봄이 되고 낮이 길어지면, 그때부터는 다시 내 사회성도 살아나 일시적으로 아웃도어 인간이 된다. 오뉴월쯤 되면 퇴근 후에도 약간의 후덥지근한 공기는 있지만 그래도 꽤 선선하고, 무엇보다 아직 밝다. 퇴근 후에도 재밌는 걸 하면 하루가 길어진다. 시간이 애매하면 저녁 먹고 괜히 산책 하자며 동료들을 꼬드기고,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기도 한다. 해가 질 무렵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한강 변을 뛰는 건 얼마 전에 새로 알게 된 재미다. 이런 계절에는 웬만해서는 열리지 않는 마음도 활짝 열려 무려 저녁 약속을 만들기도 한다. 잘 안 나가던 시내에 나가면 사람들은 묘하게 신나있고, 북적거리는 공기에선 술과 기름 냄새가 난다. 하지 이후는 아무래도 낮이 점점 줄어든다는 게 아쉽지만 그러니까 좀 더 분발해 볼까 하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여름 운동이다. 여름이라도 좀 움직일만하면 테니스를 치러 간다. 일단 다들 집에서 나오는 마음은 비장하다. 이번엔 절대 안 타겠다는 마음을 먹고 아주 선크림 범벅에 온 얼굴을 가리는 두건은 기본이고 선글라스, 팔토시… 하여튼 가릴 수 있는 곳은 다 가리고 나와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누군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덥지근한 공기와 땀이 습격하기 시작하면 다들 삼십 분도 안 되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하나씩 집어던진다. 티셔츠는 땀으로 원래 색깔보다 한 톤 더 짙어지고, 수건으로 땀을 하도 닦아서 선크림은 허옇게 여기저기 뭉쳐있고, 습한 날엔 팔과 종아리에서도 땀이 솟아 나와 번들거린다.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어 얼굴 여기저기에 붙어있고, 손에 땀이 나서 미끄러진 라켓엔 흙이 잔뜩 붙는다. 다들 집에서 가장 큰 물통을 들고나와 벌컥벌컥 마시고도 금세 물이 모자란다. 큰 음료수를 덜지도 않고 먹다가 우르르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더 이상 더러울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흙이 튀어도 음료수를 흘려도 그냥 툭툭 털고 다시 뛰어나간다. 애초에 망가지지 않는 단정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여름 테니스 같은 건 나오지 않으니까, 그럴 땐 그냥 다 같이 엉망이 된다. 삼사십 대 어른들이 그렇게 엉망이 되고도 재밌어서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다들 하하하 웃는다. 가장 새침하던 언니도 땀에 절은 티셔츠를 짜며 하하하 웃는다. 여름 햇빛 아래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더러워진다. 더러워지는 걸 개의치 않고 크게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닌다. 그렇게 종아리의 양말 선이 선명해 질 때쯤 여름이 지나간다.


  너무 더워서 못 살겠다 싶을 때는 수영장에 간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샤워를 하고 막 수영장에 발을 담그면 앗 차거, 하고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럴 땐 몸에 물을 끼얹고 그런 거 없이 물에 들어가자마자 벽을 박차고 나가야 된다. 겨울에는 몸이 예열되려면 서너 바퀴 정도는 돌아야 되는데, 여름엔 딱 한 바퀴만 돌면 차갑던 물이 금세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물을 가르며 나가는 기분은 밖에서 땀을 줄줄 흘리는 것 대비 쾌적하다. 이렇게 팔다리를 막 움직이는데 땀이 안 나다니 (나겠지만 안 느껴지다니) 수영은 정말 소중한 운동이다. 하지만 상쾌한 기분도 물속에 있을 때 한정이다. 팔이 슬슬 무거워지고, 이제 가야겠다 하고 레인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굴이 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물속에서 가뿐하게 움직이던 몸도 한층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해도 탈의실에 가면 금방 인중에 땀이 송송 솟아난다. 찬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둥 마는 둥 하고 매점에 가서 하드를 하나 먹는다. 얼굴 색깔이 돌아올 때쯤 밖으로 나가면 다시 노곤한 여름이다.


  여름에는 몸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땀이 난 곳은 축축하고, 모기에 물린 자리는 가렵고, 얼음을 물고 있는 입으로 숨을 쉬면 찬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뭐든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냉면의 시원한 국물은 더 맛있고, 딱복의 은은한 단맛은 더 크게 다가온다. 작년엔 농라에서 발견한 보현산 햇살농장의 복숭아를 여섯 박스쯤 사 먹었다. 한 박스를 열 때마다 여름이 더 좋아졌다.


  가끔 이런 여름을 몇 번이나 더 생생하게 즐길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해도 6, 70번 이상은 무리일 것 같다. 그러니까 올해도 많이 땀 흘리고 많이 먹어야지. 더 좋은 여름이 지나간 건 아쉽지만, 아직 좋은 여름이 남았다. 본격, 여름이 좋다. 진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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