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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Jan 24. 2024

지금 가장 퀴어한 쇼, <나는 솔로>

*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현재 <나는 솔로>의 포맷과는 조금 다릅니다.


  여자가 한 명씩 입장한다. 위에서 보고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뛰어가서 큰 캐리어를 들어준다. 딱 봐도 너무 힘에 부쳐 보인다. 처음엔 누군가의 매너로 시작된 일인 것 같은데 이제 그냥 프로그램의 오프닝이 되어버렸다. 글쎄 이쯤 되면 그냥 캐리어가 잘 끌리는 평평한 바닥이 있는 곳에서 촬영할 법도 한데, 대한민국에 이렇게 돌길이 많은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며 처음 알았다. 대기 장소에 도착하면 나무에 걸려 있는 자기 이름표를 뗀다. 물론 이것도 쓸데없이 높게 달아놓았기 때문에 남자가 와서 떼준다. 여자보다 키가 작은 남자도 있지만, 이 쇼의 특징은 모든 클리쉐를 촘촘하게 형식화 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키 큰 여자가 손만 뻗으면 뗄 수 있을 것 같아도 옆에 있는 키 작은 남자가 낑낑거리며 떼줘야 한다. 왜? 남자니까! 

  이 쇼에서는 본명을 쓰지 않고 모두 가명을 쓰는데, 남자는 영수, 영식, 영호, 광수, 상철, 영철 이고 여자는 영숙, 영자, 순자, 옥순, 현숙, 정숙중 하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인 1948년의 인기 이름들을 쓴 거라고 한다. 장수 프로그램 답게 이름마다 캐릭터가 있다. 보통 (전통적 의미로서의) 미인은 옥순의 이름표를 받기 때문에 모두가 옥순의 등장을 목빠져 기다린다. 

  어째 처음 입장할 때는 그냥 멀쩡한 사람들 같았는데, 희한하게 이 이름표를 받자마자 모두가 정말 1948년도의 성역할의 롤플레잉 게임에 들어온 듯, ‘솔로 나라’(*프로그램 안에서 이곳을 통칭하는 이름)의 캐릭터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나는 솔로>는 초심자가 들어오기엔 진입장벽이 높다. 누군가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고 하자. 일단 로케이션에 문제가 있다. 보통 펜션 두 동 정도를 통으로 빌려서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를 따로 쓰는데, 정말 중학교 수련회 갈 정도의 조악한 숙소 수준이다. 누런 상과 꽃무늬 이불이 생으로 나오는 데이트 프로그램이라니, 미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십 분이면 당장 꺼버리고 싶어진다. 다행히 시즌을 거듭하며 대박을 터트리더니, 제작비가 조금 너그러워졌는지 요즘은 그래도 괜찮은 숙소에 있게 되었다. 


  채널을 돌리던 사람이 재수가 좋으면 이 프로그램의 약 10%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는, 멀쩡해(보이는) 데이트 장면을 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굉장히 괴이한 상황을 마주치게 될 텐데, 대충 이런 장면들이다. 


  장면1. 

첫인상 선택을 하는 날, 남자는 자기가 선택한 여자 앞에서 이어폰을 끼고 구애의 춤을 춘다. 비유로서의 구애의 춤이 아니라 정말 팔다리를 흔드는 춤 말이다. 만난 지 오 분쯤 된 것 같은 여자 앞에서 춤을 춰야 한다니, 참가자들도 당연히 내켜 할 리가 없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어색하게 움직이는 팔다리는 춤이라기보다는 몸짓에 가깝다. 이런 걸 시켜놓고 편집하며 좋아했을 피디를 생각하면 너무나 얄미워진다.


  장면2. 

“나 영순데~ 나 너무 외로워~ 나랑 밥 먹으러 가자~” 40살쯤 되는 아저씨가 닫힌 펜션 문 앞에서 이런 문어체를 외친다. 각종 문어체 대사를 소화하는 배우들이 갑자기 너무 직업인으로 존경스럽게 된다. 여자는 나오지 않는다. 영수는 한 번 더 외친다. 이렇게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되는 단계쯤 오면, 출연자들도 솔로나라의 캐릭터가 체화되어 저런 대사를 치면서도 꽤나 당당하다. 펜션 안 여자들은 눈빛 교환을 하다가 세 명이 일어선다. 이쯤 되면 영수는 최고의 인기남이다. 의기양양하게 세 명의 여자와 함께 데이트를 나간다. 놀랍게도 데이트 비용은 방송에서 내주는게 아닌 자비 부담이라고 한다. 


  장면3. 

이른 아침, 영식이가 주방에서 뭔가 부산스럽게 하고 있다. 이것 또한 솔로 나라의 암묵적인 룰인데,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아침을 해주는 것이다. 아침을 한다고 들었을 때는 최소한 오믈렛이라도 해줄 것 같지만, 열에 아홉 정도는 계란 후라이에 케첩으로 삐뚤삐뚤한 하트를 그리는 정도다. 정말 저게 최선인가 싶지만, 사실 이 출연자들도 그저께 만난 사람에 대한 마음이 계란 후라이 정도인 것도 당연하다. 출연자를 탓하면 안 된다. 이 모든 건 연출의 탓이다. 


  <나는 솔로>에서는 이런 어이없는 장면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보통 마음이 생기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들에서, 마음을 삭제해 버리고 행동들만을 모아 이 쇼의 거대한 구조로 만들어 버렸다. 짐들어주기, 구애의 춤, 상대방의 부모에게 전화하기, 아침 해 주기, 데이트 나가기 등 모든 코너들에는 가장 클리쉐적인 행동과 문어체 대사만 남아 마치 마리오네트를 보는 듯 기괴하고 우스꽝스럽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와 가장 결혼에 가까운 롤플레잉을 하는데, 오히려 ‘결혼’만이 목적이 된 짝짓기가 얼마나 괴이한지, ‘정상 사회’를 만든다고 일컬어지는 그 수많은 형식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문제는 너무나도 쉽게 만들어지는 빌런 캐릭터이다. 일반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에서는 더 신중하게 연출해야 하는데, 이 프로그램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어느 프로그램에나 빌런은 필요하고, 적당히 양념을 치기 위해 편집을 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프로그램에는 유독 일반인임을 감안했을 때 가혹한 점들이 있다. 왠지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출연자가 늘 등장하고,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몇 주에 걸쳐서 보여준다. 아마 실제로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테지만, 편집되어서 나오는 모습은 네이트 판 최악의 소개팅 에피소드에 나올 것 같은 남자가 따로 없다. 시청자들은 재밌어하고, 그 사람의 예의 없는 행동은 한 회가 끝날 때마다 화제가 된다. 지금 벌써 15번째 솔로 나라다. 이런 식의 프로그램이란걸 알면서도 그걸 다 감수하고 나갈 사람이 줄을 섰다는 자체가, ‘결혼’에 대한 기이할 만큼의 간절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얼마 전 레즈비언 결혼 이야기를 출판하고 뉴스까지 나온 김규진 씨가 임신 소식을 담은 인터뷰를 했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댓글들을 보면서 이 쇼를 생각했다.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는 이 부부와, 이 쇼의 롤플레잉 중 뭐가 더 ‘정상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에 가까운가? 그들의 ‘정상’이란 무엇일까? 정상성을 쫓다가 미쳐버린 사람들의 퀴어함을 보고 싶다면 매주 수요일 열 시 반, <나는 솔로>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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