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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2. 2023

실향失鄕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남편이 좋아하는 ‘삼팔선의 봄’이다. 그는 그 노래를 제법 그럴싸하게 부른다.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른다. 그런데 늘 같은 대목에서 가슴이 찡해온다. 이등병이라면 스무 살 남짓한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젊은이다. 그 꽃 같은 젊은이가 고향을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니…. 


  국어사전에 고향이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목숨을 바쳐 찾아야 할 곳이란 말은 없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틀렸다고 할까.


  내 고향은 목포다. 거기서 나고 자랐다. 목포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쪽이 아련해진다. 그렇지만 목포가 우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내 근무지인 함평군에서 유년을 보냈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일 때 서울로 이사한 후 서울 학교에 다녔지만,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며 몇 번 이사했다.


  두 아들은 이제 제 가정을 꾸리고 각각 다른 곳에서 산다. 그곳에서 손자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다. 제 아비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아니고 녀석이 태어난 곳도 아니다. 손자가 자라는 동안 아들은 또 어느 곳으로 이사할지도 모른다. 훗날 그 아이는 어디를 고향이라고 말하려나.


  큰아들에게는 유년으로 통하는 요지경이 하나 있다. 함평에 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 소풍 가서 들은 산비둘기 소리다. 뒷산에서 풀밭에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을 때 “구구쎄쎄”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산비둘기 소리인 것은 나중에 알았는데 그 소리를 생각하면 함평 살던 기억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마술 거울의 입구인 듯.


  나도 그 입구를 기웃거리면 아들의 유년이 조금씩 보인다. 내 손을 붙잡고 처음 들어섰던 초등학교 운동장, 학교 가는 길에 재잘거렸던 구불구불한 골목길, 체육대회 때 작은 어깨에 메고 연주하던 아코디언. 그때 나와 아들은 아련하게 실눈을 뜬다. 그러나 아들은 그곳을 고향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넌 고향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서슴없이 목포라고 했다. 태어난 곳이란다. 그 말이 반가웠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에겐 목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머물렀던 시간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짧은 곳, 사전에 인쇄된 활자 같은 고향이다. 아들에게 ‘목숨 바쳐 찾아야 할 고향’이란 말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말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삼팔선 너머 고향을 바라보느라 평생 목이 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실향의 한을 풀지 못하고 떠났다. 아직도 그 한을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을 놓지 못할 것이다. 


  실향은 삼팔선 너머의 고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인중에는 국토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수몰水沒로 고향을 잃은 사람이 있다. 시퍼런 물아래 묻어버린 고향을 그리는 글에서는 파릇한 풀냄새, 알싸한 흙냄새,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났다. 물비린내 같은 슬픔 냄새도 났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면서 그 아픔을 함께하는 줄 알았다. 함께 갔던 관광지에서였다. 잔물결조차 일지 않던 호수가 수많은 감탄사에 물결이 일 것 같았다. 그 아래 그의 집이 묻혀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쏟아낸 감탄사를 추슬러 담지 못한 그 낭패함이라니. 함께 서서 그 물속을 들여다보았지만, 나는 차마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연어의 모천회귀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강을 거슬러 가는 물고기들은 맹목적이었다. 얼마나 죽을지, 얼마나 살아남을지도 모르면서 목숨 바쳐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 물고기들이 절절한 그리움으로 모천을 찾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유전자 깊이 새겨진 고향의 좌표, 그들은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명절이면 그런 연어들을 만난다. 고속도로가 강물이 되고 연어 떼처럼 고속도로를 헤엄치는 귀성 차량. 그들도 기억 속에 음각된 고향의 좌표를 찾아간다. 그 길에는 고향이 출렁인다. 그 길에 심장처럼 들썩이는 고향을 만져보고, 코끝에 스미는 고향을 맡아보고, 고향에 보내는 환희의 안부를 나누고 싶다. “목숨 바쳐 찾아야 하는 고향”에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싶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귀성길이 메말라 간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 가는 설렘보다 나들이의 부산함과 피로가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들어서던 초등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도 시원한 야트막한 산, 꿈에도 보이던 잔잔한 바닷물, 그런 것들이 삽화 속에서 지워져 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누던 다정한 눈빛도 따스한 손길도 멀어져 간다. 함께 살 비비며, 꼬리한 발 냄새도 함께 맡고, 걸쭉한 말 한마디에도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 귀향의 기쁨보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피로가 먼저 발을 내민다. 


  요즘 아이들은 뜨끈한 아랫목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크레솔 냄새 가득한 병원에서 태어난다. 그곳은 부모가 사는 곳일 수도 있지만 먼 도회일 수도 있다. 원정 출산을 하는 사람들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인 경우도 없지 않다. 그들에게 고향 냄새는 크레솔 냄새일지도 모른다. 회귀할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헝클어지고 고향의 좌표는 유적처럼 희미해진다.


  “고향은 새벽에 떠났다가 황혼에 돌아가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을이 다 스러지기 전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만, 그곳에 가면 과연 내 고향이 있을까.


  어쩌면 머지않아 ‘고향’은 사전 속에 박제된 언어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이 고향을 기억하고 가슴에 보듬는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때. 아니, 우리는 모두 이미 실향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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