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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19. 2023

착각

  대선 열기가 뜨겁던 때였다. 열기에 펄럭이는 것 같은 현수막 앞에서 신호대기 중이었다. 신호등이 바뀌어 출발하려는데 차가 뒤로 밀렸다. 깜짝 놀라 있는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핸드브레이크까지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평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온몸에 진땀이 흘렀다. 그때 뒤차의 경적이 울렸다. 그만 눈을 꼭 감았다. 사고를 냈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요란한 경적.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차는 시동이 꺼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옆 차로에 서 있던 차들이 점점 속력을 내고 있었다. 백미러에 비친 뒤차 운전자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였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좀 이상했다. 출발하려는데 클러치 페달이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안했지만 약속 시간이 촉박했다. 일을 마치고 나와 운전석에 앉자 클러치 페달에서 받았던 불안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지만 설마 했는데 기어이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제일 가까운 카센터를 찾아갔다. 


  “정말 이상 없다니까요. 제가 이래 봬도 기름밥 먹은 지 20년이 넘었어요.” 


  왜 시동이 꺼졌느냐, 정말 클러치에 문제없느냐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 허탈하고 맥이 풀렸다. “또야?” 습관처럼 그 의사가 생각났다.


  1급 정교사 연수 때였다. 외출했는데 급한 일이 생겼다. 70년대였으니 수세식 화장실은 구경하기가 힘들던 때다. 겨우 찾은 공중화장실이 하필 퍼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튀겨 오르는 선물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오만상을 찡그렸지만 어쩔 것인가. 다음 날, 수업 중이었다. 화장실 물이 튀긴 부분이 조금씩 가려웠다. 열도 나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나자, 온몸이 펄펄 끓었다. 재수 없이 감염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담당 교수가 동행할 사람을 붙여주었지만, 택시에 태워주는 것만으로 혼자서 병원에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사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줌마 같은 사람이 많아야 우리가 먹고는 살지요. 그런데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요? 약 줘요? 밀가루에 비타민 두어 알 넣어 싸줄까요? 그러면 금방 낫는 환자들 많아요.” 

 

 그러더니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다음!”


  기가 막혔다. 고열로 신음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이게 무슨 짓인가. 억울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모멸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의사가 너뿐이냐며 병원을 나왔는데 병원 계단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열이 씻은 듯 내리고 가려움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 후로도 그 의사가 생각나게 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한순간 발이 페달에서 미끄러졌던 것이 내내 신경 쓰였나 보다. 그래서 신호대기 중 시동을 꺼뜨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옆의 차들이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내 차가 뒤로 밀린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었다. 


  수리한 것이 없으니 돈도 받지 않겠다는 정비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유세용 차량이 길 건너에 진을 치고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지라고 후보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사람, 사람들. 그들은 갓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벌겋게 달구어진 석탄 덩이 같은 뜨거움도 있었다. 더러는 작두를 타는 무녀의 신기神氣까지도 엿보였다. 열기 아니 광기라고 해도 좋았다.


  활활 타오르는 열기를 배경으로 한 사람이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장미꽃이 피었고 꿈같은 미래가 펼쳐졌다. 반드시 그런 세상이 될 것이었다, 그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기만 하면. 후보는 메시아이고 연설하는 사람은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 같았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고 자복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또 한 무리의 차가 지나가며 누군가의 이름을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그들도 잠시 후면 어딘가에 진을 펼치고 그들의 메시아를 위해 환호하고 춤을 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지도자는 과연 이 나라를 구원할 사람일까. 여러 번의 선거가 치러졌고 몇 번이나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메시아는 없었다. 오죽하면 18년 독재와 민주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사람이 그나마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조사도 있을까. 


  세계 곳곳에 국민에게 쫓겨난 독재자들이 있다. 정해진 임기를 마치고도 그 자리를 물러나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은 정말 권력욕에 사로잡히기만 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진심으로 자신만이 나라를 짊어질 구세주 같은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에겐 ‘국가수호 염려증’, ‘국민복지 염려증’, ‘경제발전 염려증’ 같은 공통적인 증상이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을 진찰해 보면 병명은 ‘사리사욕 확장증’, ‘국민 외면증’, ‘부패 다발증’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들에겐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까. 내 기억 속의 의사와 같이 일갈할 수 있는 의사는 없을까. 할 수만 있다면 ‘양심 튼튼제’, ‘자기 성찰 촉진제’ 같은 것을 처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약은 어디 없나? 


  다시 선거철이 다가온다. 곧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애국자가 피를 토하는 열변에 귀가 먹먹해질 것 같다. 오직 자기만이 나라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광기 섞인 착각. 그에 비하면 나의 신경증적인 착각은 애교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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