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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17. 2023

사랑법

  먹태 안주가 맛있다는 집이다. 게다가 한 마리를 시키면 두 마리를 준다니 모두 호기심이 동했다. 큼직한 접시에 소담스럽게 쌓인 포와 통북어 한 마리가 담겨 나왔다.


  “와! 이거 진짜 두 마리네. 어쩜 이런 생각을 다….”


  통북어로 보이는 먹태는 머리와 벗겨낸 껍질로 모양을 낸 것이었다. 생각도 기발했고 정성스러웠다. 바삭하게 구운 것이 “먹태를 위하여!”라는 건배사가 나올 만큼 맛있고 풍성했다. 큼직한 맥주잔에 바다가 넘실거렸다. 두 마리 안주 예찬이 명태 예찬으로 이어졌다.

 

  명태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명태처럼 이름이 많은 생선이 없다니까요. 이름만 많나, 그 맛이 이름마다 일품이지. 그러자 한 마디씩 거들며 수많은 명태의 이름으로 비어 가는 안주 접시를 채웠다. 생태로 끓인 국이 해장엔 제일이야, 시원하지. 난 황탯국이 더 시원하던데. 저 앞집 코다리찜 죽인다고. 뭐야, 먹태 먹으며 웬 생태에 황태 타령이야. 맥주 안주엔 먹태가 최고라고. 노가리도 좋지. 


  명태가 럭비공처럼 뛰어다닐 때, 자칭 명태 박사라는 K가 나섰다. 지금 그렇게 이름이 많은 명태지만 처음에는 이름도 없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명천에 사는 어부 태 씨가 잡았다고 해서 명태가 되었단다. 그 후, 갓 잡은 건 생태, 얼리면 동태, 바닷가에서 말린 북어, 내륙에서 말린 황태, 반만 말린 코다리, 명태 새끼 노가리 등등. 잡는 방법, 말리는 방법, 잡는 계절에 따라 이름이 달랐다. 크기에 따라 다르고 조리하는 방법 따라서도 달랐다. 거기에다 부산물로 알로 만든 명란젓, 창자로 만든 창난젓까지 있다. 얼핏 세어도 수십 가지였다. 같은 명태라도 그물로 잡은 망태보다 낚시로 잡은 주태가 비싸다고 하니, 족히 명태학 논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강연회에서 명태 이름이 백 가지도 넘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수많은 명태가 들락거리는 동안 접시가 비어갔다. 그러나 다시 먹태를 시키자는 사람은 없었다. 과일 안주가 들어왔다. 주객들의 대화는 끊일 줄 몰랐지만, 명태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식탁에서 추방되었다. 부스러기와 껍질 몇 조각이 남은 먹태 접시. 그 위에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명태 이름들만 그득했다.


  명태는 눈이 크다. 껌벅이지도 못하는 커다란 눈이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수많은 이름을 두고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명태는 제 이름이 명태인 것을 알기나 할까? 하필 자기를 잡은 어부가 살던 곳과 그 성을 따 이름을 지어주었다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그도 모자라 어떻게 잡았는지 어떻게 죽였는지를 놓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안다면 어떨까. 명태의 그 많은 이름 중에 눈이 커다래서 겁 많게 생긴 물고기가 원해서 얻은 이름이 있기나 할까? 


  용대리 덕장을 처음 보았을 때다. 칼바람이 부는 날, 끝없이 늘어선 덕에 매달린 명태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 추위 속에서 몸을 얼리고 녹이며, 부풀었다 졸아들며 황태가 된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아미노산이 더 풍부해지고 식감이 부드러워진다는데, 매달린 채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제 몸을 다듬는 것이 고행하는 수행자 같다고 생각했다. 가끔 덕장을 떠올릴 때면 딱히 이름 지을 수 없는 느낌에 가슴 한켠이 아릿했다.


  이름 짓지 못했던 그 아릿함이 서리서리 쌓인 명태의 이름 위에서 멈칫거리고 있다. 그 이름 위에 또 다른 이름들이 하나씩 덧씌워진다. 교형絞刑, 참형斬刑, 팽형烹刑, 거열형車裂刑…. 손등에 소름이 돋을 것 같다.


  모든 것은 맺는 관계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진다. 관계론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쉽게 예를 드는 것이 호칭이다. 그렇게 보면 명태보다 더 많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만 해도 불리는 이름이 열 개는 넘는다. 아내, 엄마, 할머니, 언니, 누나, 이모, 고모, 선생님, 회장님, 작가님…. 거저 얻은 이름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이름도 있고, 아등바등 애써서 얻은 이름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제가 만든 이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남이 가진 이름을 뺏기도 한다. 그걸 뺏기 위해 사투를 벌이기도. 그렇게 뺏은 이름으로 불리다가 죽어서 그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 이름은 어쩌면 그의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더러는 불리기 싫은 이름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이름 역시 자신이 만든 이름이다. 도둑, 사기꾼, 성범죄자, 심지어 살인마까지. 그런 이름이 얼마나 갈까만, 가끔은 죽은 후까지 남기도 한다. 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는 자신이 불릴 이름을 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람들은 제 이름을 안다.


  그런데 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물고기는 왜 그렇게 이름이 많을까? 많이 잡히고 그리 비싸지도 않아 서민들의 밥상에서도 친근했던 까닭일까. 다른 생선은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담백한 맛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친숙하다는 상황이 그렇게 많은 이름을 만들어 낸 것 같다.


  가자미를 매일 맛있게 먹으며 “서로 정답고 미덥고 좋다”고 한 시인이 있다. 가자미가 들으면 기가 막힐 일이다. 가자미도 매일 그에게 먹히는 것이 정답고 미덥고 좋았을까. 명태가 ‘온몸이 짝짝 찢어져 시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고 한다는 노랫말은 끔찍하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법인지 모르지만,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가. 어느 생명체가 사람을 위해 찢기고 먹이가 되는 고통을 기뻐할까.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믿는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면 산군山君의 음식이 되어 기쁘다고 할까. 


  사람은 화로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소도 돼지도 물고기도 사람에게 먹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오만이고 착각일 뿐이다. 나는 덕장에서 명태를 보며 수행이 아닌 형벌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애써 지우려 했다. 이름 짓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추고 싶었다.


  난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구운 고기뿐 아니라 회도 즐긴다. 성서에도 동물과 식물은 사람의 식물食物로 주어졌다. 생존을 위한 살생은 자연의 이치다. 그렇지만 피식자가 포식자와 함께 즐거워할 수 없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 아닌가.


  가난한 사람에게도 골고루 먹이가 되어주었던 물고기에게 친근하다고 그 포획과 살육법에 따라 수많은 이름을 붙여준 것이 그들의 사랑법이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가혹하고 잔인하지 않은가. 황태는 추위를 견디며 말라가지만, 먹태는 따뜻할 때 말린다고 하니 덜 힘들까. 그 역시 온몸을 매달고 교형을 당하는 시간이다. 그런 먹태에게 “따뜻한 날 꺼멓게 말랐으니 먹태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염치없지 않은가. 하물며 머리를 자르고 말렸으니 무두태다, 코를 꿰어서 말렸으니 코다리다라고 이름 지은 것을 명태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사람은 다른 생명으로 허기를 채워야 삶을 이어가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 연약함을 위대함으로 착각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속이 답답하다. 맥주잔을 든다. 내가 좀 멍해 있었던지 새 안주를 권한다. 과일이 싱싱해서 맛있단다. 그러나 내 손은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로 간다. 밥알 하나 생선 지느러미 한 점 허투루 버리지 않던 옛사람들이 꼭 궁핍해서만은 아니었으리라. 손끝으로 부스러기를 모은다. 그를 뭐라 부르든 부스러기 하나라도 버리면 안 될 것 같다. 그것이 나의 사랑법이라고 하면 그 또한 얼마나 오만한 사랑이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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