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릴 때부터 김치를 안 먹였으니까 그렇지"
"내가 왜 안 먹여. 물에 씻어서도 주고, 잘라서도 주고 다 줬지"
김치를 먹지 않는 나 때문에 식탁에서 엄마 아빠의 투닥거리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왜 내가 김치를 먹지 않는데 엄마 아빠가 싸운단 말인가. 김치를 먹지 않는 게 싸움의 소재가 되는 것일까? 아빠는 나의 편식을 엄마 탓으로 돌렸고 엄마는 나를 째려봤다. 편식쟁이 막내딸은 밥상이 늘 불편하다.
"김치 안 먹어?"
"네...
"한국사람이 아니구먼"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많이 들은 말이다. 정말 김치를 먹지 않으면 한국 사람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김치를 먹지 않는 나를 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고 김치를 먹지 않으면 한국사람이 아니라고 나의 국적을 부정했다. 왜? 김치를 먹지 않으면 한국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2002년 월드컵 때 빨간 티셔츠를 입고 그 누구보다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고, 아시안게임, 올림픽, 국가대표 친선경기등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운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고작 김치 하나 안 먹는다고 나의 정통성이 부정당할 일인가? 우리의 김치를 가지고 일본이 기무치, 중국이 파오차이라고 할 때도 얼마나 씩씩거리며 김치는 한국의 것이다 외쳤는데! 나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란 말이다.
"세나씨 김치 안 먹어?"
신입사원이 들어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참견쟁이 박대리가 또 나댄다.
"네... 저 김치 안 먹어요...."
가뜩이나 입사 첫날 잔뜩 긴장한 병아리는 김치 안 먹냐는 박대리의 추궁에 쥐구멍을 찾는 생쥐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세나씨~ 나도 김치 안 먹어"
"앗, 정말요? 팀장님도 김치 안 드세요?"
세나씨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의 두 손을 맞잡았다.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인임을 부정당했던가. 우리의 맞잡은 두 손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잔소리를 묵묵히 견뎌낸 서로를 향한 위로였다.
김치를 언제부터 먹기 싫어했는지, 언제부터 먹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차갑고 익숙하지 않은 여러 가지 향으로 버무려진 양념과 절여진 배추의 맛이 싫었다. 씹을수록 인상이 써졌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파김치등 빨간 김치뿐만 아니라 하얀 물김치도 먹지 않는다. 김치를 씹으며 시원하다, 개운하다 하는 사람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면을 먹을 때도 라면 하나면 충분했다. 김치는 고사하고 단무지도 필요 없다.
왜 이 맛있는 걸 먹지 않느냐는 사람들에게 김치 말고도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다고 답했다.
"김치는 그저 기호 식품일 뿐이라고요. 저는 김치가 싫어요. 맛이 없어요"
어디 대나무숲에라도 가서 외치고 와야 할 판이다.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맥이 약하다,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느 날 방문한 한의사 선생님께서 나를 진맥 하시더니 찬음식이 맞지 않는다고 하신다. 눈이 똥그래진 나는 찬 음식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다 김치에 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선생님, 제가 김치를 안 먹는데요. 김치가 차서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냉장고에서 나온 찬 반찬들도 잘 안 받을 텐데"
그러고 보니 선생님 말이 맞았다. 나는 한번 조리한 후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차가워진 반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시 가스레인지 위에서 조리해 먹거나, 전자레인지로 돌려 먹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올레! 몸에서 찬 음식을 받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조국통일보다 더 반가운 순간이었다. 배추도사, 무도사보다 내 식성을 간파하신 선생님이 최고의 도사다!
'그래, 김치를 안 먹는 게 내 잘못이 아니었어. 내 몸에서 찬 걸 싫어한다잖아? 김치는 차가운 거야. 그래서 김치를 안 먹는 거야'
김치를 먹지 않는 정당한 이유를 마주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한국인이 되었다.
김치를 먹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이여! 당당히 어깨를 펴시라! 우리는 김치가 싫은 것이 아니라 차가운 그 식감 때문에 안 먹는 것이다!라고 외쳐 보지만... 여름에 차가운 물냉면을 좋아하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즐겨마시기에 뭔가 찜찜하긴 하다.
나이 40이 넘었다. 아직도 차가운 김치는 거의 먹지 않지만 뜨거운 김치는 좋아한다. 김치찌개도 맛있게 끓여서 즐겨 먹고, 삼겹살에 김치구이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 비 오는 날 오징어를 총총 썰어 김치전을 부쳐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김치볶음밥도 빠질 수가 없다. 단지 아직도 차가운 생 김치만 먹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김장에 참여해서 한 손 거드는 다 큰(?) 어른이 되었기에 김장철에 빨갛고 긴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도 버무릴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 생 김치의 향과 맛은 달갑지가 않다.
김장이 끝나고 수육과 겉절이 한 상이 준비 되지만 나의 것은 아니다. 이 나이 먹도록 김치를 먹지 않는다고 엄마의 잔소리를 아직도 들어야 한다. 그래도 난 수육과 겉절이가 반갑지 않다.
남은 돼지고기와 철 지난 김치로 제육볶음을 만들어 먹는다. 그것이 나만의 김치를 먹는 방법이니까.
아직도 종종 "김치 안 드세요? 한국인이 아니네요"라는 참견을 들을 때가 있다. 그들에게 자신 있게 외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