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던 엄마의 입원은 사랑니 발치 정도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입안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이를 전부 뽑아버린다 한들, 엄마의 빈자리를 표현할 수 있었을까.
세탁기 한 번 돌려보지 않은 아빠와, 반찬 투정만 할 줄 알던 딸. 입원실 침대에 누워있던 당시의 엄마는 불안해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너희도 한번 고생해 봐라.'하며 오히려 후련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이틀 정도면 좋았을 텐데, 엄마의 입원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병실에서조차 아빠의 끼니가 걱정됐던 엄마는 하루에도 수차례 전화를 걸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조목조목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엄마의 지시를 받아적으며 그날 저녁 메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뿐이었다.
"너희 아빠는 김치찌개 좋아하시니까, 그것만 잘 끓여놔도 며칠은 거뜬할 거야. 반찬은 시장에서 사 먹든가 해."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당신의 딸은 '잘' 끓일 수 없을 거라는 걸. 당신이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했을지라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아빠는 생각보다 반찬 투정이 심해서 사 온 반찬엔 젓가락 조차 대지 않았다는 걸. 우린 너무나 엄마에게 길들어 있었다.
기름 '적당히' 두른 후 김치를 '적당히' 볶아서 간장 '적당히', 고춧가루 '적당히', 다진 마늘 '적당히' 넣고, '푹' 끓이면 그걸로 끝이라는 그 쉬운 말이, 당시 내겐 제3 언어보다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적당히' 넣고 '푹' 끓여도, 엄마의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음을, 정성을 가득 들여 만든 음식쓰레기였음을, 이제서야 조심히 고백해 본다.
엄마가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스물넷 보다 나이가 많은 딸이었다. 이미 아들을 하나 낳고 내가 뱃속에 있었을 나이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나이의 엄마와 달리,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화가 났다.
엄마의 입맛대로 정돈된 양념장을 보며, 무엇이 참기름인지 들기름인지 먹어봐도 구분할 수 없었다. 진간장, 조선간장, 양조간장. 간장 종류가 그렇게나 많은지도 몰랐다. 냉장고 가득 채워져 있던 밑반찬을 덜어 먹어야 한다는 상식도 없었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야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기나 계란 후라이를 한 후 기름을 닦아내지도 않았다. 모든 게 다 엄마가 했던 것들이었으니까. 찐득거리는 가스레인지를 내려다보며, 누른 기름 찌든 내를 맡으며, 어두운 주방에서 무척이나 외로웠다.
아빠라도 나보다 나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우리를 남겨두고 입원해 버린 엄마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 나이 먹을 때까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나에 대한 한심함을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대신하는 못난 딸이었다.
아빠의 외식이 늘었다. 외식이라곤 해봐야 동료들과 술 마시며 그걸로 끼니를 대신하는 것이었을 텐데. 기껏 준비한 밥상을 그대로 정리해야 하는 탓에 신경질적으로 설거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게 엄마 탓 같아서 걱정보다 짜증이 났다.
한숨을 뱉었다. 내 입에서 나온 한숨이 내 귀로 돌아갔다. 쿵쾅쿵쾅. 괜히 숟가락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반찬 뚜껑을 세게 닫았다. 수납장 문이 꽝 닫히는 바람에, 내가 낸 소리에 스스로가 불쾌해졌다. 내 화를 듣는 건 나뿐이었기에 모든 분노와 외로움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냉장고를 열고 주섬주섬 빛 속을 헤맸다. 밀려드는 공복을 무엇으로 채울지 느릿하지만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때마침 발등으로 하나의 비닐 팩이 툭 하고 떨어졌다. 무심코 집어 든 그것에서 엄마 맛의 비결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엄마는 세 끼 식사나 간식까지 모두 직접 준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합성 조미료 따위 식당에서만 쓰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의 위치를 쫓아 뒤진 곳에서 하나 가득 발견된 고향의 맛이 나를 보며 비웃었다.
"그래, 이 맛이야."
이거였구나.
배신감이 들었다. 동시에 감탄했다. 그 작은 녀석은 생각보다 굉장했다. 자기 몸을 녹여내어 고향의 맛을 내었다.
아빠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집 나간 아빠를 돌아오게 하는 건, 대기업이 만든 고향의 맛이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