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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함은 달콤하지

by 은빛영글

안전진단 D 등급을 받자 한쪽에서는 기쁨의 환호성을 불렀고, 반대쪽에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집을 나가야 하냐. 돈도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냐. 난 아무 데도 못 간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이 한가득 불만을 토해냈다. 비교적 젊은 층이라고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토박이 어르신들이 입주민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아서 일이 일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게 나 하나만 잘 되자고 하는 건 아니지 않냐."

퉁퉁 부은 입술로 볼멘소리를 삼켰다.

같은 울타리를 쓰고 있던 이웃들의 사이가 안 좋아졌다. 서로 자기만 생각한다고 손가락질했다. 이 아파트를 부수면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안 그래도 깔고 앉은 빚도 많은데 분담금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한 건 사실 모두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예전에는 젊은 층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단지가 작은 곳이지만 장터도 열렸고, 놀이터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사계절을 겪고 자란 아이들은 점차 학군지를 찾아 떠났고, 놀이터는 주인 잃은 그네만 삐끄덕 거렸다. 깨끗한 신축 아파트가 줄지어 세워지자 새로 이사 올 사람들 역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아파트의 연식만큼이나 입주민들의 연령층이 높아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아파트 상가는 사람들이 찾지 않았고, 문을 닫는 가게들이 하나씩 늘었다. 더 이상 관리가 되지 않는 탓에 입구부터 흉물스러운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녹물이 나오고 누수가 발생해 위아래층 쓰는 사이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서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이 모든 게 오래된 아파트라는 이유로 납득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랬다. 게다가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에 신호등도 없다. 덕분에 아이들이 조금 더 어렸을 땐 회전하는 차가 우리를 못 보고 들이박을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신호등을 설치해달라고 민원을 넣어도 오히려 교통체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납득되지 않는 이유가 돌아왔다. 그렇게 나도 조금씩 받아들였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등하교를 할 땐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보호자 없이 아이들끼리만 학교를 가기 시작하자 조금 불안해졌다. 학교까지 거리가 꽤 되는 관계로 녹색어머니가 서지 않는 곳이었다. 같이 가는 친구들 엄마끼리 교대로 횡단보도까지만 건네주고 돌아오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기로 했다. 수고라고 하기엔 내 자식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신호등의 부재가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어린이가 건너고 있어요.”

어느 날부터 노란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경비 일을 해주시는 아저씨들이 돌아가며 아이들의 등굣길을 돌봐주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겠다. 누군가의 부탁이 있었는지, 어쩌면 다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양보 없는 출근길에 종종거리는 어린이들이 안쓰러웠던 건지는. 다만 그것이 그분들의 주 업무가 아니었음에도 아침마다 등교 시간이 되면 노란 깃발을 흔들어주는 마음에 감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은 짧은 인사를 건넸다. 평소 오가며 인사를 하는 사이였을까. 하지만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는 인사를 한다. 손자뻘 되는 아이들의 인사에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 그분들의 모습에 내심 안심이 되었다.

분주한 출근과 등교가 교차하는 그 시간에 아저씨 한 분이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가 불룩했다. 손을 넣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아이들에게 하나씩 쥐여주었다.

"학교 잘 다녀오렴."

허허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든다. 아이들의 작은 손바닥 위에는 동그란 눈깔사탕이 하나씩 놓여있다.


아마 근처 재래시장에서 한 봉지 가득 사 오셨을 테지. 여름엔 혹여나 녹을까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시원해.'라며 빼먹지 않고 쥐어주셨다.

사탕이 귀한 시대도 아니었고, 먹을 게 부족한 아이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손 모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며 헤헤 웃음을 짓는다.

실내화 주머니에서 빈 봉지만 발견되기도 하고, 처음 받은 온전한 상태 그대로 발견되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도 사탕을 거절하지 않는다. '사탕 아저씨'라고 부르며 은근히 반기는 눈치다.

매일 아침마다 기꺼이 흔들리는 노란 깃발. 자신이 당번인 날엔 기어이 하나씩 사탕을 쥐여주는 투박한 손가락.

그들의 달콤한 친절함에 모두의 아침이 안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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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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