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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는 전 냄새를 맡아야지

by 은빛영글

"명절에 어른들이 이 음식은 꼭 싸줬으면 좋겠다, 하는 건 뭐가 있나요?

반대로 이 음식은 절대 싸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건 뭔가요?"

라디오에서 DJ의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자의 사연을 품은 청취자와 전화연결을 하며 건넨 질문이었다. 빗속을 달리는 차 가득 명절이 채워지는 중이었다.

"갈비찜은 꼭 싸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은 제발 안 싸주셨으면 해요."

한 청취자의 목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화연결을 마친 DJ가 확인사살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의 1위는 전이라고.

"그러게. 하는 사람은 힘들고 먹는 사람도 없는 전을 왜 매번 하는 걸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기어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 추석에 냉동실에 들어가면 내년 설에 화석처럼 발견될 전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왔다.




나의 엄마는 큰며느리다. 당시 보통의 큰며느리들이 그랬듯, 당신 남편네 제삿날엔 제사상을 차리고 명절에는 차례상을 차렸다. 상 위에 올라갈 음식 외에도 집에 들를 친척들이 안주 삼아 먹을 수 있을 만큼, 아니 집에 돌아가는 두 손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주고도 남을 만큼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우리 엄마는 부자일까? 어떻게 저렇게 매번 음식을 많이 하고, 그걸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걸까?'

어린 나의 머릿속엔 항상 물음표가 떠있었다. 정작 당신은 먹지도 않는 전을 왜 저렇게 많이 하는 걸까. 하나 가득 반죽된 것들을 동그랗게 만들어 계란 물에 퐁당 넣는 동안에도 그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방으로 튀는 기름 세례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채 식지 않은 전을 하나씩 입에 주워 먹는 맛은 나쁘지 않았다. 금세 속이 니글거리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명절의 맛이고 냄새라 여겼다.

그런 엄마가 더 이상 전을 부치지 않겠노라 선포했다. 제사는 줄이고 그마저도 성당에서 대신 보내기로 했다. 명절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도 했으면 됐다. 이젠 힘들어서 못하겠다."

항상 종종거리며 굽어져 있던 당신의 허리를 그제야 두들기며 말했다.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은 건, 어쩌면 반기를 든 K 며느리의 죄책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IMF를 겪으면서 우리 집이 예전보다 작아진 탓도 없진 않았을 것이다. 줄줄이 벨을 누르던 친척들의 방문도 뜸해졌고, 그마저도 서로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야 했다. 그럼에도 아빠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을 욕받이로 내어 준 용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우리 집에서 기름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시원하고 섭섭했다.



결혼하고 나니, 명절에 다시 기름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시댁에서는 여전히 차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워낙 부지런한 시어머니가 뚝딱뚝딱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동안, 게으른 며느리는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전을 부쳤다. 싫었던 냄새가 조금은 반가웠다.

라디오를 들으며 검색창에 단어 몇 개를 넣어봤다. 명절에 대체 왜 전을 부치는 건지 궁금했다. 절대 전 부치기 싫으니 나를 납득시키라는 의미는 아니다.

고기가 가득 들어간 전은 귀한 음식이라 특별한 날인 제사나 명절에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고기가 귀한 음식이 아닌 세상인 지금은 큰 의미가 없는데. 또한 전을 부친다든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가족들이 한자리에 둘러앉기에 화합을 의미한다고 했다. 전을 부치며 화합을 그리다니. 싸움이 나지 않으면 다행 아닐까. 또다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해가 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시부모님의 얼굴이 빼꼼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지난주에 봤지만 그새 많이 컸다며 손주들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두들겨준다. 오자마자 텔레비전 리모컨부터 찾는 녀석들 곁에 앉아 그간의 근황을 묻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녀석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에선 꿀이 뚝뚝 떨어진다. 손주라는 존재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어마어마한 짝사랑이다.

한바탕 소란이 정리될 때쯤, 공기에 퍼져있던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밥은 먹었니, 배고프지 않니, 따뜻할 때 한 입 먹어보렴. 쉬지 않고 다정함을 건넨다.

"이번엔 딱 사람 먹을 만큼만 준비했다."

어차피 거짓말이다. 혹시라도 누가 더 오지 않을까 하는 설렘으로 아픈 허리를 두들기며 준비했고, 먹는 사람이 없다 한들 부족함이 없어야 하기에 구겨진 지폐를 꺼내 맞바꾼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이 당신의 사랑이고 표현인데 자꾸만 외면하고 싶어지는 삐뚤어진 며느리다.

"맛있어요."

우물거리는 한마디에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좀 싸줄까?"

기어이 봉지를 꺼내 주섬주섬 사랑을 담아준다.

"어차피 많이 안 했어. 한두 번 먹을 만큼만 담아줄게."

꾹꾹 눌러 담고도 부족해 무엇을 더 챙겨줄지 고민하느라 바쁜 손가락이 보였다. 사방에 튄 기름 사이에 진통제가 보인다. 당신의 아픈 허리보다 자식이 먼저인 무식한 사랑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손주들의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두 장을 꼭꼭 접어 넣어준다. 떠나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든다. 다 큰 자식이 집에 잘 도착했는지 걱정되어 도착했다는 전화가 올 때까지 졸린 눈을 부릅뜨며 기다리고 있을 당신. 공기 중에 가득 퍼진 기름 냄새는 그들의 사랑이고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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