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예상 도착시간과 함께 여러 가지 경로를 추천해 준다. 멀지 않은 거리를 가는 데에도 다양한 노선을 알려주고, 그마저도 도로 상황에 따라 다른 길을 추천해 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레 애플리케이션에 오류가 나기라도 하면 놀이동산에서 엄마 손 놓친 어린아이처럼 당황스러울 수밖에. 다급해진 마음으로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반대 손으로는 다른 내비게이션 앱을 실행시키기도 한다.
종종거리는 애미의 속을 모르는 녀석들은 뒷좌석에 앉아 자기 손바닥 안 세상을 유영하고 있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스마트폰 좀 보지 말라 아무리 외쳐도 아이들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는 게 분명하다. 농도 짙은 가을 하늘만 머쓱한 얼굴로 흰 구름을 높이 품어 올릴 뿐이다.
이렇게 여름이 끝나가고 있구나. 그 짧은 순간에야 비로소 내 눈에도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ㅇㅇ야, 하늘 좀 봐. 구름이 너무 예뻐."
"응."
시큰둥한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들려온다.
"만져보고 싶다."
"엄마. 구름은 수증기야. 만질 수 없어."
"…. 너 T야?"
낭만이라곤 없는 녀석. 머쓱함에 입술을 꽉 깨물어봤다. 다시 작동한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오른쪽 발끝에 무게를 실었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의 어린 시절, 내 자리가 앞좌석이 아닌 뒷좌석이었던 그때. 나는 장거리를 이동하며 무엇을 했었을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무엇으로 지루함을 달랬을까. 덜컹거리는 바퀴에 몸을 맡긴 채 기억을 더듬어봤다.
삼 남매가 옹기종기 엉켜 낮잠을 자기도 했고, 지나가는 차의 번호판을 읽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지도를 살피고 아빠가 핸들을 잡은 우리 차가 다른 차를 추월해 지나가는 동안 약간의 짜릿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엄마가 미리 준비해 놓은 오징어를 씹기도 했고, 방광이 채워지면 숲길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볼일 보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들을 부러워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은 마당에 소 한 마리가 사는 오래된 시골집이었다. 가족끼리 서로 친구였던 누군가의 할아버지 댁이다. 당시 우리는 여름방학에 그곳에 가서 휴가를 즐기다 오곤 했다.
너무나 까마득한 기억이라 어쩌면 왜곡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극에서나 보던 오래된 집처럼 느껴졌던 건 기억난다. 굽이굽이 숲길 끝에 만난 흙담은 도시의 돌담에 비해 낮았지만 정겨웠다.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대문 대신,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대문이 양팔을 크게 벌리고 우리를 반겼다. 도시에서 온 손주와 그의 친구 가족들을 위해 열어둔 것인지, 바지런한 일상을 살아가던 집주인의 게으름에 수리가 덜된 건지는 모르겠다.
졸졸 흐르는 도랑에 발을 담그고 발끝을 간질이는 차가움에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고작해야 강습받던 수영장이 전부였던 도시 놈들은 시골의 서늘한 맛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집주인이 웰컴푸드를 꺼내 왔다. 우리의 머리통만 한 수박. 그것은 여름의 냄새와 맛을 품고 있었다. 달려드는 파리와 모기를 쫓아가며 부지런히 입을 벌리는 아이들은 어느새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들기며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맴맴. 요란한 소리와 공기 중에 퍼져있던 모기향의 냄새. 여름을 온몸으로 느꼈다.
"옥수수 먹어라."
배가 꺼지기도 전이었다. 이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 여러 개가 동그란 쟁반에 실려 나왔다. 이미 수박으로 배가 채워졌는데도 여러 개의 손이 바쁘게 옥수수를 향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어린 우리가 잡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앗, 뜨거워.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작은 손은 옥수수를 잡았다 놓치길 반복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작은 손가락을 바라보며 엄마들이 손으로, 입으로 알맹이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을 길게 뻗어서 한번 훑으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옥수수 알맹이가 소복이 쌓였다. 이가 빠진 자리에 옥수수 한 알을 끼워 넣고 웃는 친구의 모습에 모두가 함께 웃었다. 옥수수 알을 털어낸 양 끝에 휴지를 감싸 쥔 녀석은 앞니로 열심히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었다. 앙 하고 깨문 한입에 옥수수 몇 알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면 그것마저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이들도 옥수수를 좋아하지. 옥수수는 좋아하지만, 손에 들러붙는 끈적한 느낌이 싫다는 녀석들을 위해 위생 장갑을 끼고 한 알씩 뜯어내던 며칠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깔끔한 성격도 아니면서.
잔뜩 쌓인 옥수수 알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즐거워하는 녀석들 얼굴 위로 언젠가의 내 얼굴이 겹쳐 보인다. 이미 새빨개진 손가락이 털어낸 옥수수알은 밥을 지을 때 한 움큼 밀어 넣기도 했다.
나의 수고로움이 너희에게 행복이 될 수 있음에 기뻤고, 언젠가의 너희가 여름을 떠올리며 오늘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구름이 예쁘긴 하네."
한참 만에 뒷좌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전 여름에 멈춰있던 나의 시간이 다시 오늘로 돌아왔다.
"너 핸드폰 시간 다 썼구나?"
"엄마 T야?"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실몽실 피어오른 구름에 마음이 설렌다. 가을이다. 지독히도 더웠던 여름이 끝났다. 채 물들지 않은 은행나무잎을 보며 옥수수를 떠올리다니. 내년에도 너희를 위해 옥수수 알을 털 나를 상상하며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