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은 미역국으로 시작해서 육개장으로 끝나지.

by 은빛영글

주말 아침의 게으름을 깨운 건 한 통의 부고 소식이었다.

소식의 주인공은 남편의 친척이었다. 결혼 후 몇 번 얼굴 본 적 있는 사이다. 집이 멀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면을 튼 사이인데 그런 소식이 들려오면 그와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지와 별개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죽음이란 그런가 보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감사함과 동시에 여전히 살아있음에 대한 미안함.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건강한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젊으셨을 때 한 미모 하셨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것이 언뜻 내 남편의 얼굴과도 조금은 닮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이 들렸다.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일찍부터 아픈가 보다, 나이가 먹어 그런가 보다, 들여다보는 자식들이 없으니 더 그렇지. 입에서 입으로 오가는 소식에도 별다른 관심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어쩌면 ‘남’이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오후 일정을 취소하기로 했다. 곧 다가올 남편의 생일을 맞이해 시부모님과 저녁 식사가 약속되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닌, 영원한 이별을 가슴에 묻는 자리가 되었다. 그것이 나의, 그리고 우리의 최소한의 예의였다.

하지만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해당하는 건 아니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녀석들은 주말에도 꽤나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도서관이나 학원을 가는 것이라면 좋았을 텐데. 어제도 본 사이고 내일도 만날 거면서 오늘의 약속을 취소하라고 하니 입이 툭 튀어나온다. 뾰로통한 녀석들의 입술 곁에 내 입술도 그려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 으른이니까. 나도 가기 싫거든. 그딴 소리는 잠시 마음속에 접어 두었다. 남편 삐질라.

친구들과의 약속은 둘째치고 저녁에 할머니랑 갈비 먹기로 약속했는데 못 먹는 거냐고, 입술이 한 번 더 튀어나왔다. 누가 들으면 고기 못 먹고 자란 줄 알겠네. 갈비 대신 편육 먹으러 가자며 검은 옷을 찾아 입히는 내 곁에 둘째가 뽀로로 다가와 앉는다.

“그럼 육개장 먹는 거지? 고사리 맛있는데.”

풉. 웃음이 터졌다. 육개장이라는 단어에 컵라면을 떠올린 큰 아이 덕에 한 번 더 웃음이 터졌다.

죽음이며, 영원한 이별 같은 게 아직은 어려운 나이였을까? 아직은 그 슬픔의 크기를 모르는 녀석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 해맑음이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라며, 주변 어르신들의 안녕을 빌어보았.




우리가 찾아간 그곳은 여느 장례식장과 다를 바 없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건네며 눈빛으로 알은체를 한다.

최근 찍은 사진이 없다 보니 오래전 사진에 한복을 입혀 영정 사진을 꾸며주었다고 했다. 정말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고인은 그 사진이 맘에 들지 모르겠다. 언젠가의 예쁘게 웃는 사진을 찾아서 올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어색한 얼굴을 보며 고개가 떨궈졌다.

사람들이 눈물을 훔쳤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크고 작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들의 기억과 시간 속에 스며들어있는 고인의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했다. 그리고 이별을 받아들인다.

살이 빠졌네, 애들이 많이 컸네, 하는 일은 어떠냐, 건강은 어떠냐. 뻔한 인사말이 몇 번 오고 간 자리에 어느새 그릇이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다. 과일, 떡, 음료, 밑반찬을 곁든 육개장까지. 한상 가득 자리를 잡는다.


육개장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오래 끓여 깊은 맛이 우러나오고 뭉근하게 익은 야채가 숟가락질을 할 때마다 조용히 딸려 나온다. 평소에는 먹지 않았을 것들도 본연의 맛을 숨긴 채 입에 들어가면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아니 오히려 낫다.

둥둥 떠있는 붉은 기름을 숟가락으로 저어 반으로 쪼갰다 붙이길 반복했다. 끊어진 줄 알았던 생명의 끈도 이렇게 다시 엉겨 붙을 수 있다면, 지금 모인 이들이 기뻐할 수 있을까.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훑어본다.

어쩌면 후련할지도 모르겠다. 길고 긴 투병생활 겪는 이에게도 지켜보는 이에게도 괴로움이었을 테니. 첨벙첨벙 흰쌀밥 한 공기를 덜어 넣으며 부질없는 생각도 휘휘 저어 날렸다.

액운을 막고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는 붉은색의 기운처럼.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 없이 평온하길, 마음속으로 빌어보았다.


육개장 한 그릇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역국 한 봉지를 샀다. 비록 갈비는 먹지 못했지만 남편의 생일날 미역국을 끓여야 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분만실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겠지.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세상처럼.

아기 엄마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는 어떤 이의 손길을 떠올리며 입에 남은 붉은 맛의 여운을 맛보았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4화추억은 떡볶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