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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생활은 된장찌개. 아니, 김치찌개

by 은빛영글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오빠와 새언니가 심하게 부부 싸움을 했고, 그 소식이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저 졸렸던 내 귓가에 그들의 부부 싸움 소식은 아이들 노는 동안 영어 음원을 틀어놓은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부부 싸움도 하고, 아직도 열정적이네.”

“알아서 하겠지.”

엄마는 무성의한 딸의 말이 못내 서운했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던데, 내 팔은 도무지 구부러지지 않았다.

“잘 맞으면 그게 부부냐. 그냥 적당히 맞춰가는 거지.”

입안에서 쓰디쓴 웃음이 새어 나갔다.




김치찌개를 좋아한다. 돼지고기와 신 김치를 넣고 달달 볶은 후 뭉근하게 푹 익힌 국물을 좋아한다. 불에서 내려진 후에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에 숟가락을 첨벙 담가 동그랗게 떠오르던 모양을 흐트러뜨렸다. 그러고는 국물부터 한입 떠 입안을 채운다. 매콤하면서 새콤한 붉은 국물은, 텅 빈 나의 위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정갈하게 자리 잡은 흰쌀밥 위로 새빨간 국물을 한 숟가락 덜어 비비는 거다. 숟가락에 들러붙은 김치 한 조각은 찌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했기에,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것을 기어이 떼어낸 후에야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깊숙한 곳까지 양념이 밴 돼지고기와 두부까지 찾아 올리면, 더 이상의 반찬이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김치찌개에서 김치 빼고 모든 걸 다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이는 아마도 신 김치를 좋아하던 아빠의 입맛에 맞춰진 식단이었을 것이다. 가족끼리 입맛이 서로 닮아가는 게 아니라 아빠의 입맛에 아이들이 길들여지는 그런 시스템이었던 것 같다. 나의 엄마는 지금도 “엄마는 생김치를 더 좋아해.”라고 한다. 그럼에도 50년 가까이 함께한 당신의 남편을 위한 묵은지는 김치냉장고 한편에 항상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엄마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댁은 김치찌개를 즐겨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치찌개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된장찌개를 더 좋아했다. 나랑 안 맞는다. 최소한의 성의로 그저 두부만 몇 개 떠먹을 뿐이다. 분명 같은 모양의 두부였지만, 시어머니의 손에 닿은 그 녀석은 택배 상자처럼 누런빛을 띄고 있었다.

결혼 전 30년 동안 먹었던 된장찌개보다 결혼 후 십여 년간 먹었던 된장찌개의 양이 더 많을 것이다. 구릿한 냄새가 풍기는 청국장까지 한 덩이 넣어 끓이면 앉은 자리에서 공깃밥 두 그릇 정도는 순식간에 해치우는 그들이었다.

일 년간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 좋은 날짜까지 받아 된장을 직접 담그는 정성이었으니. 시댁 식구들이 된장에 얼마나 진심인지는 덧붙일 필요 없을 것이다. 삼겹살을 구운 날엔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칼칼한 된장찌개를 끓였다. 속이 더부룩하거나 아이들이 함께할 때는 어떤 매운맛도 첨가되지 않은 단어 그대로의 된장찌개였다.

입맛이 없어서, 오늘은 그냥 생각나서, 남편이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요리 중 하나라서. 그렇게 나의 주방에는 된장찌개 냄새가 가득하다. 확실히 파는 된장보다 깊은 맛이 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겐 된장찌개일 뿐이다.



엄마의 김치냉장고에 신 김치가 가득 채워지듯, 언젠가 나의 손도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엄마가 끓여준 거랑 좀 다른데?”

그가 말했다. 당연하지. 난 당신 엄마가 아니니까.

“그럼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

그랬더니 정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된장찌개를 끓여달라던 그였다. 남자 나이 서른이 넘어도 아직 애구나. 이 사람은 호적만 분리됐을 뿐이지, 아직 정신은 엄마 품에 안긴 꼬꼬마였다. 그럴 거면 엄마랑 살지 결혼은 왜 했냐고 툴툴거렸다. 그럼에도 남편이 출근한 후 시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된장찌개 레시피를 물어보던 나는 어쩔 수 없는 K 아내였나 보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다. 이 남자와 결혼생활을 십 년 넘게 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입맛이 맞게 끓여지나 보다. 기분 좋은 날엔 엄지손가락을 세워주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두 공기 싹싹 긁어먹는 남편이 있다. 내가 결혼을 한 건지, 머슴을 키우는 건지. 고봉밥을 비워놓고 “잘 먹어서 좋지?”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남편에게 영혼 없는 미소를 건넨다.

그래,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다. 내 손맛에 길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의 입맛에 내가 놀아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남자와,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여자가 만났다. 여자는 숭덩숭덩 청국장도 밀어 넣고, 남자 몰래 고향의 맛을 한 스푼 덜어 넣기도 한다. 남자는 된장도 잘 담그는 엄마가 담가주신 김치를 아까운 줄 모르고 푹푹 끓여 김치찌개를 끓여준다. 사실 여자는 그 속에 들어있는 고기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건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스팸이나 참치를 넣어놓고 뿌듯한 표정으로 꼬리를 흔든다.

비록 퀴퀴한 냄새의 찌개와 고춧가루가 사이사이 끼어드는 찌개의 만남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조각을 맞춰가는 중이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그러니까오늘저녁은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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