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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랑은 김밥이지

by 은빛영글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 낳아 잘 키우자’ 시대에 태어났다. 정부에서 내건 슬로건이 무색하게 위로 오빠가 하나,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다.

당시 부모님은 서로 엄청 사랑했나 보다. 매일이 신혼이었나 보다. 덕분에 자식 셋을 줄줄이 낳았는데, 막내를 낳고는 건강보험 적용이 안되서 출산 직후 바로 퇴원했다고 한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처럼, 엄마의 막내 출산기는 사십년 넘은 지금까지 동생의 생일 날 마다 들어야 하는 모험담이다.

오빠와는 세살 터울이다. 오빠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부터는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이 같은 날 겹치지 않길 바랐고, 교복을 맞추던 날엔 부모님의 지갑이 홀쭉해지는 걸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의 교집합은 그 정도였다.

동생과는 한 살 터울이다. 어쩌다보니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한 우리였지만, 서로 다른 외모만큼이나 우리의 소풍날짜도 겹치는 날은 없었다. 학년마다 소풍 날짜가 다른 탓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소풍 시즌이 되면 세번의 김밥을 싸야했다는 말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김밥은 믿음직스러워요.
재료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예상 밖의 식감이나 맛에 놀랄 일이 없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김밥은 정말 정직한 음식이다. 자신이 무엇을 품고있는지 실날하게 드러내 보인다. 수플레, 까르보나라, 똠양꿍 같은 이름을 처음 만났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메뉴판에 사진이 첨부되어 있어도, 이것들이 어떤 향과 맛을 낼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눈빛을 가진 사람과 마주한 것 처럼, 녀석들의 이름 앞에서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애써 태연한 척, 익숙한척 하기도 했다.

그에비해 김밥은 얼마나 정직한가. 소고기 김밥, 치즈 김밥, 야채 김밥. 이름만 봐도 내용물이 무엇인지, 어떤 맛과 향을 낼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빨간 색연필을 쥔 선생님보다 친절한 음식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친절한지는 모르겠다. 적당양의 은박지를 펼쳐 그 위에 얹어 돌돌 싸기만 하면 되는 정도인 건 맞다. 한정식처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접시가 필요한 음식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고작 은박지 한장에 들어갈 정도가 아니었음을, 엄마가 된 지금에야 알았다.



급식 세대가 아니었다.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야 했다. 새벽 이슬을 밟고 등교할 자식들을 위해 그보다 더 이른 아침을 시작해야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위한 저녁 도시락까지 싸는 날도 있었다. (그 시대에 엄마로 살지 않음에 감사한다.)

한 녀석의 소풍 날, 다른 메뉴의 도시락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끼를 위한 김밥을 싸는 게 과연 편했을까? 가족 수가 다섯이나 됐으니, 엄마는 몇줄의 김밥을 싸야 했을까?

식탁 위 재료를 가득 채워놓고 그 앞에 마주 앉은 엄마의 모습은, 은박지에 싸져있는 김밥 한 줄 처럼 작고 작았을 텐데. 김밥 꼬다리를 집어먹는 교복입은 나의 손은, 그런 엄마를 마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정갈한 김밥을 싸주셨다. 적당히 간이 배어있고, 직접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어 믿음직스러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계란을 잔뜩 풀어 후라이팬에 올린다. 끈쩍거리는 액체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아직 새근새근 자고 있을 가족들이 혹여나 깰까 싶어, 당신의 손등에 기름이 튀어도 ‘악’소리 한번 내지 않고 그저 꿀꺽 삼켜야 했을 것이다.

김밥용 햄의 묵직한 덩어리를 싹뚝싹뚝 썰며, 누구하나 햄이 크고 작다고 서운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갈하게 잘라냈겠지. 당근 하나를 가늘게 채 써느라 손목이 시큰거리는 와중에도, 생 당근보다 불에 살짝 익힌 당근이 영양가가 더 좋다는 얘기에 채 식지 않은 후라이팬 위에 한 가득 담았을 것이다. 야채를 먹으면 죽는 줄 아는 편식쟁이 딸이지만, 김밥 속에 들어간 시금치는 먹으니까. 시금치에서 튀어오른 흙탕물이 당신의 앞섬을 얼룩지게 만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데치고 국물을 짜내며 정성을 담았다.

꼬다리를 좋아하는 자식을 위해 김밥 끝까지, 차고 넘치도록 재료를 꾹꾹 눌러 담는다. 혹여 옆구리가 터진 녀석은 볼 것도 없이 당신의 입으로 향했다. 사랑하는 내 자식들에게 예쁘고 단정한 것만 맛보게 하고 싶어서, 흘러내리는 밥풀을 허겁지겁 밀어넣는 동안, 그제야 당신 뱃속에도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음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왜 안깨웠어.”라고 툴툴거리는 녀석과, 소풍날엔 깨우지 않아도 빨딱 잘 일어나는 녀석까지. . 새둥지같은 머리를 만져줄 수 없는 참기름 범벅된 엄마의 손은, 투덜대는 자식들의 입 안에 쏙쏙 꼬다리를 넣어주었다. 체하지 말라고 미리 준비해놓은 매실물 한잔씩 따라 마시라는 잔소리까지 빼먹지 않았다.

고작 김밥 한줄이 아니다. 속까지 꽉꽉 채워진 엄마의 사랑, 김밥이었다.



#김밥엔라면이지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시, 픽사베이, 드라마 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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