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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by 은빛영글

퇴근하고 싶다. 아직 출근도 하지 않았지만, 퇴근했으면 좋겠다. 터덜터덜 걷는 길은 도보로 고작 10분 거리지만, 10일이 걸려도 도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통장에서 카드값이 빠져나갔다는 알림음이 느릿느릿한 발걸음에 채찍질한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다. 보통은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한 번씩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 간다. 잠을 설친 탓에 졸음이 쏟아진다거나, 전날 무리하게 마신 술자리 후유증으로 심한 갈증이 나는 날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다만, 평소보다 많은 양의 카페인이 필요한 탓이다.

언젠가부터 커피는 내게 매일 챙겨 마셔야 할 보약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침마다 반드시 한잔 털어 넣어야 채 깨지 않은 세포들의 눈꺼풀을 잡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인은 목구멍을 훑고 넘어가며 ‘일어나, 이것들아!’라고 떠들어댄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진한 커피 향도 썩 마음에 든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헐떡이며 바쁘게 움직인 아침 시간에 주어지는 단 몇 분의 평화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커피의 향처럼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치열하고 전투적이다. 세상 참 호락호락하지 않다. 쉬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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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면 입을 크게 벌리고 흰 쌀밥을 잔뜩 품은 숟가락을 맞이한다.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뚝배기를 저어 국물도 떠먹는다. 분명 ‘후, 후’ 불어 식혔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식지 않은 열기로 혓바닥이 얼얼하고 입천장이 까지기 일쑤다. 그래도 좋다. 묵직하게 위장을 채워주는 온기에 조금은 헛헛했던 마음이 가득 채워졌으니까.

메뉴판에 인쇄된 사진만 봐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맛과 냄새 때문일 것이다. 알고 있는 맛을 맛보는 순간, 만족감은 최대치로 상승한다.

배가 부른 탓일까? 눈이 슬슬 감긴다. 그럴 때 보부상 같은 가방을 뒤적이면 별게 다 나온다. 중요한 물건을 찾는 것처럼 다급한 척 연기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언제 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색바랜 영수증부터 딸아이의 머리끈까지. 나와 상관없는 것들도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아 맞다. 도서관에 반납하려고 들고나온 책은 며칠째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속을 헤집으며 달콤한 군것질거리를 찾는다. 운이 좋으면 구석 어딘가에서 초콜릿이나 사탕이 나온다. 물론 사탕은 박살 나 있고, 초콜릿도 뭉개져 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허공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의 속도만큼 빠르게 나의 혈당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다. 피곤해 죽겠다. 낮게 읊조리며 손을 부지런히 놀린다.

그것들을 입에 털어 넣고 끈적이는 손가락을 껍질에 문질러 닦아낸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꺼져가던 화로에 불이 밝혀지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저녁 시간엔 주방에 서서 열심히 칼을 움직인다. 비록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쉐프들처럼 근사한 상을 차리지는 못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나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내 기분대로 뚝딱뚝딱 하나의 음식이 만들어진다.

고춧가루를 잔뜩 풀고, 청양고추까지 야무지게 송송 썰어 넣어 요리한다. 코끝이 간질거려 연신 재채기가 쏟아져 나온다. 매운맛은 통증이라더니, 콧구멍에는 유희였나 보다. 콧잔등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는 나의 분노와 짜증이 담겨있다. 얼굴 모르는 상대라고 막말했던 고객의 전화부터, 말 안 듣는 아이들과 남편, 그럼에도 그들 덕에 돈을 벌어 그들을 위해 요리를 할 수 있는 나의 현실까지. 휴지 한 장을 뽑아 콧등에 맺힌 마음을 닦아낸다. 정성껏 그린 눈썹이 지워질세라 조신하게 얼굴을 톡톡 두들긴다. 건조했던 휴지에 나의 땀이 스며들 때쯤이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따위는 금세 잊힌다. 얼얼한 혀의 통증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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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피곤한 순간엔 그윽한 커피 향을 떠올린다. 어쩐지 외롭고 힘든 날엔 따스한 흰 쌀밥이 생각난다. 오도독오도독 과자를 씹으며 공허함을 달래본다. 눈물인지 땀인지가 무엇이 중요하랴. 피부가 머금고 있던 수분기를 닦아내며 화나고 속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면 된다.

먹고, 자고, 싸고.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식(食)’은 단순히 배를 채우고 생명의 연장선을 이어가는 도구가 아니었다. 치열한 하루에서 잠시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순간이며,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텨낸 나를 위한 위로다.

그렇게 든든하게 세끼를 챙겨 먹고 나면 하루가 끝난다. 아, 오늘 하루도 잘 먹었다. 잘 견뎠다. 내일은 뭐 먹지?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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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