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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관리는 영양제로

by 은빛영글

새벽 4시 반, 알람이 울린다. 부쩍 추워진 날씨를 탓하며 눈을 뜨는 대신 이불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간다. 오늘의 내가 이럴 줄 어제의 나는 알고 있었나 보다. 5분 간격으로 끈질기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결국 백기를 흔들고 만다.

"공복엔 찬물보다 미지근한 물이 좋대."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넘실거린다. 언제부터 내가 엄마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코웃음을 쳤지만, 손가락은 냉수 대신 정수 버튼을 누르고 있다. 한여름엔 미지근하게 느껴졌던 온도가 이제는 냉수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세포를 깨우느라 분주하게 온몸을 훑는 정수 한 모금은 언젠가의 나의 엄마처럼 부지런하기만 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플라스틱 통을 찾아 유산균부터 찾았다. 정성스레 한 알을 집어 입안에 털어 넣는 거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영양제들이 그 뒤를 따라 하나씩 스며들었다. 아침마다 영양제를 먹는 행위는, 게으른 주인을 만난 탓에 녹슬고 있는 몸뚱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운동을 하지 않는 게으른 현대인의 비겁한 변명이었다.

날씨가 추워진 탓일까, 어제 많이 걸은 탓일까. 덜그덕 거리는 몸을 잡아당기니 온몸의 관절이 살려달라 비명을 지른다. 그럼에도 좀처럼 잠에서 깨지 않는 정신 탓에 오늘도 커피부터 한 잔 타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공복에 카페인이 안 좋다는 걸 설마 내가 모를까. 그럼에도 매일 두세 잔씩 빼먹지 않는 건 카페인이 내게 보약이고 각성제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아니 오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는 힘이다. 오후의 체력을 끌어 쓰는 것이면 어떻고, 내일의 체력을 끌어 쓰는 것이면 좀 어떠냐 이 말이다. 당장 지금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게 더 급한 것을.



체력 하나는 자신 있던 때가 있었다. 하루이틀 밤을 새운다 하더라도 휴대전화 급속 충전기처럼 몇 시간 쪽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루 종일 가뿐하던 보통의 이십 대가 내게도 있었다. 그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던, 내가 가진 것의 감사함을 모르던 오만함을 이제야 뉘우쳐본다.

한 모금의 정수가 지나간 자리를 카페인이 따라 흘러가면, 속이 조금 쓰라리다. 공복에 카페인 탓일까, 어제 마신 맥주 탓일까. 느릿하게 움직이던 심장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하면 드디어 본격적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때로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버겁기만 하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세상을 쫓아가기에 내 속도는 느리기만 했다. 이러다가 내 가랑이가 버티지 못하고 찢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때쯤 죄책감이 느껴진다.

내 몸을 너무 돌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아직 어린 내 아이들에게 건강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밀려드는 불편한 마음에 생채소를 꺼내 씹기도 한다. 아삭아삭 입안에서 조각나는 양배추 조각이 고장 난 나의 위장에 위로가 되길 바라며,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군다.

언젠가부터 부쩍 떨어진 체력 탓에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요즘이다. 비단 당장의 체력이라든가 흘러내리는 뱃살만을 위함이 아니다. 운동을 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하지 않는 이유 역시 많은 게 사실이다. 물론 가장 큰 건 수많은 핑계와 게으름이라는 걸 나 역시 알고 있다. 대충 살고 싶지만 건강하고 싶은 나란 인간의 이중성은 오늘도 게으른 현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해되지 않는 이유를 수없이 복기하며 나의 뇌를 속인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너무 불편해하지 마. 스스로에게 과한 채찍질은 참아 줘. 허공을 향해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무겁게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가까스로 충전되었던 나의 체력도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몸은 소파나 침대 따위에 널브러져 있다. 아, 역시 운동해야 하는데.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다.

그럼에도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 꺼내서 마시는 건 잊지 않는다. 오늘을 버티기 위해 공복에 커피 한 잔을 들이켜듯, 오늘을 무사히 버틴 나를 위해 축배를 드는 셈이다. 새벽 시간에 비해 든든하게 채워진 위장은 친절하게 알코올을 받아준다. 찰랑이는 알코올의 힘으로 남은 하루 잘 버텨보렴, 나를 토닥여준다.

아뿔싸, 어쩐지 아침부터 속이 쓰리더니 맥주 한 모금에 속이 부대끼는 기분이 든다. 기분 탓이겠지. 애써 모른척하며 한 모금 더 홀짝여본다. 솔직한 몸뚱이는 자신의 뇌마저 속이려던 나의 발악에 져주지 않았다.

차마 뱉지 못하는 잔소리를 대신해 콕콕 찔러대며 신호를 준다. 알겠다, 알겠어. 무슨 말인지 내가 모르겠니. 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을 연다. 가만있자, 간에 좋은 영양제가 뭐가 있나.


아....젠장.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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