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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Nov 04. 2024

엄마, 데리러 오지 마-1

“그래서 예쁜 공주님은 멋진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언제 잠들었는지 혜정의 몸에 어깨를 기댄 상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백번쯤 읽어준 책이지만 여전히 좋은지 행복한 표정이다. 쌕쌕대는 숨소리가 귀여웠고, 사이사이 들리는 코 고는 소리마저 사랑스러웠다. 정수리에서 나는 꼬순내도, 포도송이 같은 발가락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곳 없이 예뻐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작은 새처럼 노래를 부르던 입술은 토라질 때 삐죽거리는 모습마저 몹시 사랑스러워 혼내야 할 때도 단번에 무장해제 되었고, 단정하게 빗질 된 와중에 삐죽 튀어나온 잔머리는 통통 튀는 아이의 웃음소리 같아 쓰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찹쌀떡 같은 볼살은 말할 것도 없고 있는 힘껏 달려와 품에 안길 때는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의 몸은 작았지만 품 안 가득 벅차오름을 느끼게 해주는, 거대한 존재감을 뽐냈다.

‘이렇게 완벽한 존재를 낳았다니.’

도대체 아무리 뜯어봐도 부족함이 없다. 잘못 건들면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레 끌어안고 이불을 덮어줬다. 굳게 닫힌 눈꺼풀을 보며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아무리 말해도 혜정의 마음을 담기에 부족했다.     


전쟁통 같은 등원 준비 시간에도 아이를 꾸며주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딸 키우는 재미’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듯 아이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은 유튜브를 보고 연습해 반드시 해줬고, 원하는 스타일의 옷은 어떻게든 찾아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한여름에 부츠를 신어도 OK, 공주 드레스도 OK, 아무 날도 아닌데 한복을 입고 간다고 해도 OK였다. 너만 행복하다면, 너만 예쁘다면 문제 될 것 없다.

오늘은 선녀 머리가 하고 싶단다. 한올 한올 정성껏 빗고 땋고 묶어서 고객님 주문에 맞추고 나면 저린 손끝 따위 아이의 함박웃음이면 충분히 보상됐다. 동화 속 선녀가 너보다 예쁘겠니.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아이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누구 딸이 이렇게 예뻐.”


전신거울 앞에 서서 이리 보고 저리 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함께 물들어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머리와 어울리는 옷을 골라 신발을 신으며 시계를 보니 지각일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 옷도 머리도 예쁘다고 행복해하는 너의 손을 잡고 있으니까. 세상 누구보다 아이를 보고 있는 지금의 혜정이 가장 행복할 거라 확신했다.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이의 모습을 칭찬할수록 수줍게 올라가는 아이의 입꼬리가 사랑스럽다.

유치원이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발걸음은 빨라졌고, 어느새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친구 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은 꽃밭을 향해 날갯짓하는 나비 같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닳아버릴 것 같아 아깝다.


혜정에게 아이는 세상의 전부였고 살아가는 이유였다. 출산 과정 중 목숨과 맞바꿀 뻔해서 그런지, 이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어 그런 건지 단어 그대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아마 그때 목숨을 잃었다 해도 이 아이를 낳았음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자신의 존재 따위 그때 죽었다고 여기고 오직 아이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엄마, 데리러 오지 마.”   

  

몇 시간 만에 만난 딸은 엄마 품에 안기는 대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나 그냥 유치원 차 타고 집에 가면 안 돼? 집에도 혼자 들어갈 수 있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언니 노릇이 하고 싶은 걸까. 푹 숙인 고개 사이로 보이는 까맣게 반짝이는 두 개의 눈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아이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혜정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을 배배 꼬고 시선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손을 내밀기라도 한 것처럼 혜정과 거리를 두고 걸었다. 벌써 사춘기라도 온 것처럼 구는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아이는 하원길 필수코스였던 놀이터도 건너뛰고 편의점 문도 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곧장 집으로 향했다. 피곤한가. 평소와 다른 모습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걱정됐다. 오늘 하루 어땠냐는 혜정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는지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초조하기까지 한 표정은 혜정을 둘러싼 공기마저 전염시켜 함께 초조해졌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여전히 대답이 없다.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대신 아빠가 오면 안 돼?”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작은 입술이 열리더니 아까와 비슷한 말이 툭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뒷말이 이어졌다.     

“아니면 골목 끝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라.”

“무슨 말이야?”

“다른 애들 엄마는 날씬하고, 예쁜 옷도 입고 오는데, 엄마도 그러면 안 돼?”



“엄마가, 부끄러워?”     


‘설마’하며 던진 질문에 '그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용히 끄덕이는 아이의 머리는 아침에 곱게 땋아준 선녀 머리가 여전히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선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쁘지 않았다. 오히려 잔인했다. 저 머리를 해주기 위해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떠올랐다. 순간 멍해졌다.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그대로 굳어버린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저 아이의 행복한 얼굴 하나 보기 위해서였는데, 아이의 얼굴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굳어버린 건 비단 아이뿐만은 아니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뚱뚱하다고 담임선생님을 바꿔 달라고 우는 아이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일하는 엄마들처럼 뾰족구두를 신고 예쁜 옷을 입지 않은 자신의 엄마를 창피해하는 아이의 이야기도 들었다. 부모가 애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신에게도 해당할 거라 생각 못 했다. 식은땀이 났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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