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채 화장실 문을 닫았다.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나았다.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때 입는 옷인지 외출복인지 경계가 모호한 원피스는 목 주변도 살짝 헐거워져 있었고, 하원한 아이와 주먹밥 만들기 할 재료를 다듬느라 튄 음식물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어쩌면 그 전부터 물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화장실 조명이 사진 맛집이라며 셀카도 찍던데, 선크림조차 바르지 않은 얼굴빛은 화장실 조명 아래 칙칙해 보일 뿐이었다.
‘입술에 뭐라도 바를 걸 그랬나.’
아이를 꾸며주느라 정작 자신은 눈곱만 겨우 떼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아침 등원 길에 만난 엄마들이 어떤 옷을 입고 다녔더라. 온통 아이만 바라보느라 다른 이들을 살필 여력이 없었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 까만 눈동자에 세상을 담고 있었나 보다.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마음이 쓰라렸다. 별거 아니라고 웃어넘기기에 거울 속 혜정의 모습은 너무 선명했으니까.
스마트폰을 열었다. 혜정은 기분이 우울할 때 사진첩에 가득 찬 아이의 사진을 본다. 음식이나 풍경, 남편이나 그녀의 모습은 없고 오직 아이만 가득하다. 엄마를 향해 웃는 얼굴이 담겨진 사진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마치 지금도 그녀를 보고 웃어주는 것 같았다.
SNS를 열어 아이의 사진을 올리기로 했다. 분명 혜정의 계정이지만 그녀의 지분은 없다. 사진첩에 있던 예쁜 얼굴들만 가득한 공간이다. 아이의 성장이 그녀의 인생이었고 아이를 향한 칭찬 댓글은 자신을 향한 칭찬처럼 느껴져 뿌듯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연 김에 손가락을 대충 밀어 올려 다른 사람의 것에도 밀린 하트를 눌렀다. 형식적인 하트이기에 굳이 사진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천천히 둘러봤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자신처럼 무채색인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온통 아이들인 건 다른 이들도 비슷했지만, 그들의 것에는 엄마들의 모습도 있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즐기는 브런치 사진, 아이와 여행을 가 찍은 날씬한 수영복 사진 혹은 운동을 하거나 공부 인증 사진까지. 평소에는 생각 없이 하트만 누르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아이의 한마디 말 때문인지 눈에 들어왔다. 무채색은 없었다.
“짜증 나.”
화면이 꺼지며 까맣게 변해버린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무표정한 얼굴. 푸석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를 내려다봤다. 분명 자신의 얼굴인지만 낯설었다. 이렇게 생겼었나? 입술 옆으로 깊게 파인 주름마저 선명했다.
"못생겼네."
느릿하게 입 밖으로 빠져나간 문장은 혜정의 귀로 들어와서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저는 정말 못난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머리가 몽롱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안개 낀 숲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어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른 채 주변만 더듬거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한마디가 이렇게 큰 타격을 주다니.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은 ‘엄마 예뻐’를 달고 살던데 혜정의 아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잔인하도록 솔직하네. 쓴웃음이 나왔다.
옷장을 열었다. 아이가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했고, 자신을 위해서도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옷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적당한 게 없었다. 임신하면서 찐 살은 여전히 빠지지 않아 ‘언젠가 빠지면 입어야지’라고 모셔둔 것들은 당연히 맞지도 않았다. 유행도 한참 지났고 티셔츠는 온통 음식과 기름이 튄 자국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임부복으로 산 원피스였다.
한참을 뒤졌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이가 던진 한마디는 개구리도 때려죽이고 연못도 썩게 했다. 혜정의 옷장도 마음도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한탄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그러니까 신경 좀 써’였다. 위로가 아닌 아이의 말에 동의하는 말이었다. 서럽다. ‘다른 집 엄마들처럼’이라고도 덧붙였다. 넘어져 피가 흐르는 무릎에 먼지를 털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쓰라리다.
‘가족들을 위해 나를 지우고 살았는데, 돌아오는 건 가족들의 무시뿐이네요. 심지어 저를 부끄러워하더라고요. 너무 서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사랑하는 딸과 남편은 더 이상 혜정이게 위로와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앞장서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서글픔과 갈 곳 잃은 분노는 스마트폰 화면에 흔적을 남겼다. 누군가의 위로가 간절히 필요했다.
하루 종일 의미 없이 옷장을 뒤졌다. 아무리 땅을 파도 메마른 우물에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듯이 아무리 뒤져도 예쁜 옷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놓친 옷이 있지 않을까 싶은 처절함이었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화장품은 이미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있어 쓸 수 없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그것들이 마치 자신의 초라한 모습 같아 봉지 주둥이를 단숨에 묶어 버렸다. '당장 내다 버려야겠어.' 집 앞 마트에 잠깐 나갈 때도,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는 것도, 아이의 손을 잡는데도, 등·하원을 시키러 외출할 때도 용기가 필요했다. 모두 혜정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서운함은 두려움이 되고 곧이어 분노로 그 모습을 바꿨다.
낡은 집은 지저분한 것이 음식물이 잔뜩 튄 자기 모습인 것 같아 티끌 같은 먼지에도 오물을 뒤엎은 듯 미친 듯이 걸레질했고, 작은 과자 부스러기에 한 조각에도 살인범을 쫓는 형사처럼 괴성을 질렀다. 오전에 청소를 마쳐 이미 깨끗해진 화장실도 뭐가 그리 거슬리는 건지 다시 락스를 들이부었고, 놀이터 모래가 묻어있는 운동화는 당장 급한 한 켤레를 빼고 전부 솔로 문질렀다. 아무리 벅벅 문질러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모습처럼 아무리 깨끗하게 씻으려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청소로 풀다니, 그것마저 스트레스가 됐다.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멀쩡한 눈이 두 개 달린 사람인데 설마 몰랐겠나. 단지 애써 외면했고 자신을 꾸미는 시간에 차라리 가족들에게 더 집중했던 것뿐이다. 반듯하게 다림질한 셔츠를 입은 남편과 샤랄라 공주님 치마를 입은 딸아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 시간을 부정했고 그녀의 존재를 외면했다. 구깃구깃한 원피스 끝자락에 운동화에서 튀어나온 구정물이 튀었다.
구정물을 헹궈야 하는데 눈물이 흐른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흐르는 물을 따라 운동화에 묻어있던 구정물이 화장실에 넓게 퍼졌다. 지저분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 같아 서러워져 또 울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가 밀려드는 수압에 헐거워져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처럼 그동안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펑 터졌다. 혜정의 눈물을 잠궈 줄 손잡이 따위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구정물을 끌고 내려가는 물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함께 끌려 내려가면 이곳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점점 옅어지는 그것들의 끝자락을 붙들고 싶었다. 나만 이렇게 찝찝하게 두고 가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 한바탕 청소하고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어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다.
'엄마도 엄마의 삶을 살아야 해요. 간식도 예쁜 그릇에 담아 드시고, 절대 아이가 남긴 밥 같은 거 먹지도 마세요.'
'맞아요! 스스로 존중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혜정의 글에 댓글이 달렸다. 자기 존중? 누가 몰라서 안 했나. 훈계하지 말고 위로를 해달라고! 차라리 남편 나쁘다고 딸이 잘못했다고 욕해달라고! 차마 자신이 하지 못했던 말들을 누군가의 글에서 대리만족하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대체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삶이다.
그릇 정리를 해 볼까. 생각대로 정갈하게 정돈된 것들을 보면 마음이 조금 나아질까 싶어 주방을 향하는 혜정의 눈길이 식탁 위에 놓인 종이쪽지에 멈췄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하온이 유치원 가 있는 동안 아웃렛이라도 가서 옷 좀 사 입어.”
남편이 놓고 간 쪽지와 카드에 눈물이 다시 터졌다. 감동? 그건 아니었다. ‘너 진짜 구려.’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외모가 권력이었다.
[익명 게시판]
남편이 귀여운 척을 하네요? 와이프가 애교가 없는 게 늘 불만이었거든요. 인정! 제가 애교가 좀 없긴 해요. 하지만 태생이 이런 걸 어쩌겠어요.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요즘엔 자기가 식구 중 가장 애교가 많다고 유난까지 부려요.
어이없어서 정말. 대체 누가 그런 걸 보고 애교라고 하는 건지. 본래 애교라는 게 보는 사람이 느끼기에 귀엽고 사랑스럽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진짜 안 본 눈 삽니다. 얼마가 들어도 사겠어요. 애교의 완성은 결국 얼굴이라는 걸 모르나 봅니다. 아빠의 만행을 지켜보고 있는 아이의 표정도 썩 좋진 않네요. 외모가 권력이고 애교의 마무리입니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예요.
하, 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