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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Oct 28. 2024

사라지지 않는 두 줄-2

따뜻한 듯 하지만, 긴장된 공기 사이를 걸었다.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촉촉한 공기는 아영 대신 눈물을 흘렸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배가 볼록한 산모들 사이를 걷는 납작한 아랫배가 초라했다. 행복과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의 그녀들 사이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아영과 그녀를 둘러싼 공기만 그저 고요했다. 온통 행복한 표정의 아이들이 재잘대는 놀이동산에서 솜사탕을 손에 쥔 채 떠난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이처럼.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마음처럼. 애써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어 차라리 눈을 감았다. 젠장. 아이라니, 엄마라니.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독한 꿈을 꾼 듯, 가위로 싹둑 깨끗하게 잘라낸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취가 덜 풀려 술에 취한 듯 어지러운 와중에 아랫배를 만져봤다. 당연하지만 아랫배는 여전히 납작했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

“많이 힘드시죠. 수술 중에도 많이 울었어요. 몸도 마음도 잘 추스르세요.”

상냥한 듯 기계적인 간호사의 업무적인 인사말에 발작 버튼이 눌렸다. 아랫배를 움켜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소란스럽던 병원을 뒤덮을 정도로 목 놓아 우는 그녀의 울음소리는 비명과도 같았다. 배가 볼록한 그녀들도, 함께 온 남편들도. 아무도 아영을 말리지 않았다. 자신의 커다란 배가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아이와 부모가 존재했는지 미처 몰랐다. 달리는 차 밖으로 보이는 낯선 이들의 모습들.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는 엄마의 손길, 아빠의 품에 안겨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아기,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아이들. 지금까지는 여유로운 미소로 바라봤을 풍경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떤 고문이 이보다 잔인할 수 있을까. 마취약을 핑계 삼아 눈을 다시 감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차의 진동에 잠시 잠이 들었나 보다. 어디선가 ‘엄마, 나 여기 있어요! 나를 왜 없애려는 거예요? 살고 싶어요!’라고 절규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의 아기일 거라 확신이 들자, 눈이 번쩍 떠졌다. 남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영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일어나 봐, 집에 다 왔어. 괜찮아?”

“왜 깨웠어!”

영문도 모르는 그에게 버럭 화를 내고 나니 통증이 느껴졌다. 왈칵 피가 쏟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티끌만 한 아이가 자궁에 달라붙어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것 같았다. 손톱 끝을 세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깊고 강렬했다.

‘아픈 걸 보니 나는 살아 있구나. 너는 사라졌는데, 나만 이렇게 살아버렸어.’

아무렇게나 던져진 가방은 지금 아영의 마음 같았다. 무심하게 튀어나온 산모 수첩에는 초음파 사진 대신 수술 영수증이 끼워져 있었다. 아기에 대한 기록은 지난주에 받은 뻥 뚫린 검은 구멍이 인쇄된 종이가 전부였다. 분명 이번 주에 심장 소리 들으러 오라 했었는데. 아기는 존재했었지만, 흔적이 없다. 그리워할 기억조차 없다. 아기용품을 검색하던 노트북만 식탁 위에 놓인 채 전원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본처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긴 상간녀의 모습 같았다.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은 퉁퉁 붓고 푸석한 거지꼴이다. 세수하고 욕실 장을 열었을 때 아영의 발 앞에 툭 떨어진 것은 수건이 아니라 임신 테스트기였다.

선반 한 칸을 가득 채운 테스트기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이 샀을까. 이제 와 후회한들 뭐가 달라질까. 아영은 끊임없이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까, 단지 대량 구매가 더 저렴했던 걸까. 어쩌면 꽤나 간절히 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술하는 중에 기억을 도려내기라도 했는지,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어쩌면 습관처럼 상자를 열어 테스트기를 꺼내 변기에 앉았다. 기억이 조작된 걸까. 분명 깨끗하게 청소된 자궁이었을 텐데 천천히 두 개의 줄이 선명해졌다. 이전에 봤던 것과 같은 속도로.

‘혹시 꿈인가? 어떤 게 꿈이지?’

후다닥 달려 나가 산모 수첩을 거칠게 펼쳤다. 살랑대며 떨어지는 영수증은 마지막 잎새처럼 희망의 끈을 끊어 버렸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다. 아, 아니었구나. 생리통처럼 기분 나쁘게 쿡쿡 쑤셔대는 이 통증도, 영수증도, 두 줄이 그어진 테스트기도 모두 현실이다.

‘한 번 더 보고 싶어.’

생수, 음료수, 우유. 찰랑대는 것은 무엇이든 뚜껑을 열어 닥치는 대로 입에 들이부었다. 갈증 따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야 했고, 헛구역질이 계속 났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아기가 자궁에서 그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느릿느릿 두 줄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아기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기억해야만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억지로 밥을 쑤셔 넣고 출근해야 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생활했다. 그렇게 견뎌야 했고, 살아가야 했다. 한 번씩 느껴지는 통증과 쏟아지는 혈흔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아영이 화장실을 찾는 횟수는 늘었다. 잔뜩 사 둔 테스트기를 전부 써 버릴 때까지, 혹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번지는 두 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흔적을 기억하고 싶었다. 수도꼭지에 틀어놓은 물소리에 숨어 눈물을 흘렸다.     


“이모가 태몽 꿨다는데, 혹시 너희 좋은 소식 있니?”     

휴일 아침부터 아영과 남편을 부른 시어머니는 밥상 앞에 두 사람을 앉혀놓고 다짜고짜 물었다. 불편하고 불쾌하다. 대답하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잔소리 폭탄이 터졌다.

설마 피임하는 거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아이를 낳아야 한다, 아이가 있어야 부부 사이가 좋아지는 거야. 부부관계까지 선 넘은 참견을 하며 귀가 따갑게 들은 그 말을 반복하는 시어머니는 TV에서 봤던 기억력 좋은 앵무새 같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 모양도 비슷한 것 같다.

‘그렇게 아이가 갖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하나 더 낳으시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꾹꾹 눌렀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만 남겨놓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시어머니의 말을 끊었다. 화장실을 향하는 아영의 주머니에는 테스트기가 들어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그리워하는 아영은 분명 혼자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혼자가 되어버렸다.     



[익명게시판]

대박! 저 경품 당첨 됐어요!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받지 않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받고 싶더라고요. 지난번에 마트에 장 보러 갔을 때 응모한 게 당첨 됐대요! 무려 로봇청소기라니. 얼마 전에는 라디오에 문자 보낸 게 당첨돼서 뮤지컬도 보고 왔거든요.

행운 총량의 법칙일까요? 사실 제가 운이 좀 없는 편이거든요. 평생 누리지 못한 행운이 한꺼번에 몰려오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나 살걸.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저는 맛 집 투어 갈 예정! 요즘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요. 또 어떤 행운이 찾아올지 두근두근해요!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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