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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Nov 08. 2024

건강검진 문진표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삶

한 해 걸러 한 번씩 국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준다. 열심히 세금을 낸 덕일까, 무료로 기본 검진을 해준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은밀한 거짓을 행해야 함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다른 건 속일 수 없다. 기계가 내 정수리를 쥐어박으며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눈이 침침하지만, 시력이 그대로임을 알려준다. 그래, 노안이다 이거야. 아직은 키가 줄어들지 않아서 다행이군. 안도와 안타까움 사이를 터덜터덜 걷는다. 덜덜 떨며 벌린 입안을 대충 눈으로 훑으며 스캐일링을 권하는 상대에게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치과는 언제 와도 무섭다.


하지만, 속일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음주 구간이다.

문진표를 훑어보는 눈은 도로 위에서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관의 빨간 봉을 발견한 것 마냥 긴장된다. 오늘의 내시경을 위해 어제도 그제도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지난 363일 동안 마셨던 것들이 떠올라 괜히 움츠러들곤 한다. 창문을 내리라고 손짓하는 경찰관의 손끝에 있는 작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같다. 이상하게 경찰만 보면 긴장이 된단 말이지.

사실 당당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에 표기를 한다 한들 의사가 "당신 거짓말이지?" 하며 멱살을 잡을 것도 아니고, 주 1회든 7회든 음주는 좋지 않으니 술 마시는 횟수를 줄이라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선뜻 솔직하게 적어내질 못한다.

'거의 매일 마십니다. 주 7회, 한 달 30회 정도 마시죠.'라고 적을 수는 없어 적당히 타협한다. 주 2회라고 살포시 적어본다. 두세 잔 마시는 양은 한잔이라고 그 양도 줄여 적는다. 거짓말을 함에 있어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걸 보니 잘못된 걸 알긴 하는가 보다.


나만 그래?

나만 쓰레기야?


그럼에도불구하고 결과지는 나를 힐난한다. 이것도 많으니, 건강을 생각해 양을 줄이라 했다. 니예~ 니예~ 분부대로 해야죠. 축 처진 아랫배를 움켜잡고 보니, 그래그래, 줄이긴 해야 할 것 같다. 다음 건강검진 때는 좀 당당해져야 하지 않겠나, 하며 약간의 반성을 곁들여본다.

마취가 덜 깬 눈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머리가 무겁고 뱅글뱅글 도는 것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만 더 머물다 가기로 했다. 지금 병원을 나서면 나자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수면 마취가 이렇게 힘들었나, 속도 메스꺼운 것 같다. 아, 그래. 술에 취한 느낌이구나.

마시지 않았는데 마신 기분이 드니 어딘가 억울했다.


때마침 부르르 몸을 떠는 휴대폰 액정에 첫째 아이의 이름이 보였다. 고기가 드시고 싶으시단다. 오는 길에 사 오라고 지령을 내렸다. 오는 길에 만두랑 순대도 사 오라는 남편의 덧붙임도 빠지지 않았다.

자동차 유리에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힘없이 흐느적대며 고깃집을 향했다.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목살과, 둘째 아이가 좋아하는 육회를 주문하고 차차 맑아지는 정신에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이다, 별일 없구나. 빨갛게 수줍은 자태로 내 두 손에 안긴 녀석들을 보니, 오늘도 글렀다. 육회가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싶다. 수입 맥주 4캔에 12,000원 광고 앞을 맴돌았다.

화장실도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하지 않나. 문진표를 작성하고 검사를 받는 동안 느꼈던 긴장감과 반성, 그리고 다음을 위한 계획 따위 사라진 지 오래다. 뽀얗게 나타났다 흔적을 감추는 입김처럼.


에라,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 

본디 다이어트도 내일부터 아닌가. 절주도 내일부터. 육회를 바라보며 자기 합리화를 시켜본다. 이렇게 핑계와 변명이 또 늘었다. 떼잉!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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