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엄마는 친구들 사이에서 '티코 아줌마'라고 불렸다.
165cm 큰 키에 작고 빨간 티코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작은 티코로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꼬마 자동차 붕붕처럼.
티코는 엄마의 발이자, 우리의 발이었다. 엄마의 봉사활동이며 취미 생활을 위해 부릉부릉 바쁘게 움직였고, 혹 늦잠이라도 잔 날은 헐레벌떡 뛰어갈 필요도 없이 우리를 교문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친구들과 외출할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출동해 노란 셔틀버스라도 된 것처럼 모두를 태우고 목적지까지 향하곤 했다. 때로는 교복 입은 우리를, 때로는 동네 아줌마들을 태우고 꽃향기를 맡기 위해 붕붕 방귀를 뀌며 옆 동네까지 달리기도 했다.
삼 남매가 경쟁하듯 그려낸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고 다니던 티코의 운전자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초보운전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조수석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순식간에 주차에 성공하는 능숙함을 보였다.
아빠의 큰 그림이었을까. 엄마가 운전에 능숙해짐에 따라 아빠는 핸들을 엄마에게 종종 넘기곤 했다. 장거리 여행이 힘들 때, 술에 취한 날, 자연스레 엄마가 핸들을 잡고 아빠는 곁에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특히 엄마의 대리운전 스킬이 가장 빛나는 건 친척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엄마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데 반해 아빠는 술을 상당히 좋아했기에, 명절이나 제사 따위의 친척 모임이 있는 날이면 자연스레 술잔을 채우곤 했다. 종일 주방에서 시달렸을 엄마는 그럼에도 묵묵히 핸들을 잡고 잠든 아빠를 태운 채 집으로 향했다.
시골집 마당에서 강아지랑 뒹굴던 아이들이 자라 하나씩 성인이 되었다. 딸보다 아들이 많았던 이쪽 집안 아버지들은 훌쩍 자란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손을 흔들며 하나씩 떠났고, 우리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들의 뒤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길을 떠나는 어른들의 얼굴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여있었던 것 같다. 나의 오빠도 성인이 되면 핸들을 잡고 아빠를 태워주겠지 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부 잘하던 오빠는 운전면허 필기에서 떨어져 자존심이 상했는지 '운전을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닌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사람이 되겠다.'며 호기를 부렸고, 덕분에 친척 오빠들처럼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지 못하는 아빠는 여전히 엄마에게 핸들을 부탁했다. 싫었다. 왜 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싫었다.
"어른이 되면 면허부터 따야지."
오기가 생겨 갓 스무 살이 넘었을 때 면허 학원을 등록했다. 당당하게 한 번에 합격한 후 뿌듯한 마음에 면허를 들고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운전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온 식구의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의 믿음 따위 들지 않았을 실력이다. 고작해야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 가서 장롱면허를 들이대며 렌터카를 빌렸을 때 한두 번 해보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주차를 제대로 하지 못해 렌터카 궁둥이를 벽에 박을 뻔했다. 덕분에 숙소 직원이 나와 대신 주차해 주는 민망한 상황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었다.
어쩌면 갈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든든한 장남도, 귀여운 막내도 아니었던 내가 뭐라도 하나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었던 꿈틀거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수석에 앉아 '나는 우리 딸 믿는다.' 하시면서 핸드브레이크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아빠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면허를 딴지 20년이 넘었다. 몇 년 전부터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고, 좁은 골목은 여전히 벌벌 떨며 지나가지만, 고속도로도 겁내지 않고 액셀을 밟는다. 가끔은 가만히 서 있는 벽에 다가가 옆구리를 긁어댈 때도 있지만,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며 기어이 빈 곳에 자동차 궁둥이를 들이밀기도 한다. 가족들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러던 작년 가을, 친정 부모님의 여행에 동행하게 됐다. 남편과 큰 아이는 시댁으로 갔고, 나와 작은 아이는 아빠 차 뒷좌석에 몸을 싣고 경기도 어디쯤에서 전라남도까지 긴 여행을 떠났다.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의 아빠는 여전히 운전대를 내게 넘기지 않았다. 엄청난 교통체증에 예상 시간 5시간보다 두세 시간이 더 걸렸음에도 꿋꿋하게 운전석을 지켰다. 허리가 아파 더 이상 운전하기 힘들어진 엄마에게도, 20년 전 핸드브레이크를 부여잡게 했던 큰딸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장렬하게 전사할 때까지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던 뒷모습은 어린 시절 뒷좌석에서 봤던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날도 아빠는 괜찮다며 운전석에 몸을 밀어 넣었다. 본인이 세운 코스에 맞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나라도 좋은 곳에 데리고 가고, 하나라도 맛있는 것을 더 먹여주겠다며 미리 세워둔 계획에 따라 우리는 말 잘 듣는 패키지 여행객들처럼 열심히 사진도 찍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시골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빨리 찾아왔다. 워낙에 시골이었던지라 숙소와 떨어진 곳까지 움직여야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도보로 걷기엔 무리가 있었고, 버스 배차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근사하게 한 상 차려진 회 앞에 끔뻑이던 그의 눈빛엔 피로가 가득했다.
손을 들어 소주 한 병을 시키고, 한잔을 가득 채워 그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산대 앞에서 서로 계산하겠다고 아옹다옹하는 아저씨들처럼 내게 마시라고 하던 아빠는 못 이기는 척 결국 입술을 댔다. 차가운 소주가 목젖을 흔들고 온몸으로 퍼지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역시 회에는 소주지."
빈 잔에 쪼르륵 한잔을 더 채워 넣었다.
숙소에 돌아온 후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마셨다. 탄산이 몸에 퍼지자 피곤함이 몰려오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운전면허를 딴지 이십여 년 만에 술 마신 아빠의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을 위해서였구나.
면허 따놓길 잘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