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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Nov 22. 2024

상처에는 알콜 소독이지.

우다다다 달려가다 콩크리트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아이가 있다. 여린 피부는 차가운 바닥에 쓸려 껍질이 벗겨지고 붉은 속살을 보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뭇한 모래가 박힌 상처에서는 곧이어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릎에서 시작되어 정강이까지 타고 내려오는 상처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처음 한 방울이 물꼬를 틀어주기라도 한 듯 뒤이어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모래를 털어낸 손으로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무릎과 비슷한 꼴을 한 손바닥을 보고 더 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쩔뚝거리는 어린 나의 팔을 잡고 엄마는 약국을 향했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손까지는 차마 내밀지 못했던 어린 딸의 팔을 잡아끌듯 데려갔다. 약국 의자 한쪽에 앉아 약사가 쥐여주는 커다랗고 동그란 비타민을 입에 문 후에야 까만 눈물을 멈췄다. 먼지가 뒤덮인 얼굴에 눈물이 지나간 자리는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엄마가 한 손으로 어깨를 꽉 잡고 반대 손으로 무릎에 소독약을 뿌렸다. 한 방울씩 꿈틀대며 피를 토해내던 무릎은 이윽고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지저분한 것들을 정화했다. 반도 채 녹지 않은 비타민을 물고 있던 입은 침인지 비타민인지 알 수 없던 것들을 토해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아파!"

작은 딸의 울음 따위에 손놀림을 멈출 엄마가 아니다. 아이를 셋이나 키워 낸 그녀는 거품이 사그라들 때쯤 신속하게 거즈로 살살 닦아내고 빨간 약을 발랐다. 이미 충분히 흰 거품을 토해낸 여린 속살에 빨간약의 붓이 스치고 지날 때면 얼굴이 찌푸려지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빨간약은 만병통치약이었다. 긁힌 곳에도, 까진 곳에도, 쓸린 곳에도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핥아주곤 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따가워 소리 지르며 울다 잠이 들었을지, 이제 약을 발랐으니 괜찮아졌다고 다시 뛰어놀았을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상처가 벌어진 상처 위로 덧씌워졌을 수도 있겠다. 그냥 그렇게 상처를 소독하고 잊고 넘어지길 반복했다.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는 것은 더 이상 많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분명 같은 몸이고 더 무거워졌지만, 예전처럼 넘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뛰지 않아서 그럴까? 물론 그렇다고 아예 넘어지지 않는 건 아니다. 눈길 혹은 빗길에 미끄러워 넘어지기도 했고,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가다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다. 그때만큼 크게 다치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울지 않는다.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먼저인 나이가 되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혹 가까운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떡해.'라고 속삭이거나 '괜찮으세요?' 하며 손을 내밀면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을 꾹 누르고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쓸어내리며 "괜찮아요."라고 답한다. 순간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자리를 떠나는 걸로 나의 괜찮음을 증명한다. 어차피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니까. 그들도 알 것이다. 내가 괜찮지 않음을. 그래도 괜찮아야 했다.




이름에 따라붙는 단어가 늘었다. 성인, 직장인, 아내, 며느리, 그리고 부모. 점점 아픈 걸 아프다 솔직하게 털어놓기 힘들어졌다. 그저 손바닥이나 무릎이 아플 뿐이었던 그때보다 온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날이 늘었다. 그저 내 다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던 그 시절에 비해, 내 행동이 아닌 것들로 아픈 경우가 많아졌다.

너 때문에 아프다고 탓할 수도 없게 됐다. 아프다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더 이상 빨간약이 통하지 않기 때문일까, 내게 빨간약을 발라주는 이가 없기 때문일까. 화장실에 숨어 눈물과 함께 꿀꺽 삼키고, 가득 채운 술잔에 꾹꾹 눌러 꿀꺽 삼키고, 식구들이 잠든 후에야 일기장에 쏟아내며 뱉어낼 뿐이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파 죽겠다.'


차마 말하지 못한 것들을 그제야 뱉어낸다. 일기장 여백이 까만 글씨로 채워지는 동안 술잔을 채우는 횟수가 늘어난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숨기려던 슬픔과 아픔까지 틈 사이로 잡아 끌어낸다. 그렇게 담아두지 말라고, 괜찮으니 뱉어내라고 토닥여준다. 빨간약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하얗게 일어나던 거품처럼, 술잔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새까만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오늘도 크고 작은 상처에 빨간약 알콜을 부으며 새살이 솟아나길 바라본다. 오늘도 애썼어, 잘 견뎠어. 이렇게 내일도 살아가면 되는 거야. 나의 빨간약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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