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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Oct 18. 2024

술집 화장실에서 가을 모기를 만났다.

한여름 꿀잠을 자는 동안 귓가에 들리는 모기의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잔뜩 잠에 취해 차마 불을 켜고 그 녀석을 잡을 수가 없을 때는 손을 몇 번 휘저은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조금 더운 편이 눈을 뜨는 것보다 나을 거라 여기며. 하지만 인간의 게으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불 속에서 다시 한번 그 녀석의 애앵 소리를 들을 후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지.' 하며 온전히 내 몸을 녀석에게 내어줄 수도 있다. 그런 날 그 녀석은 아마도 잔뜩 부른 배를 두들기며 행복하게 잠들겠지. 오늘 내가 마신 술을 자네도 한번 마셔보게나, 하며 다리를 벅벅 긁었다. 반대로 '내가 너를 잡기 전에 다시 눈을 감나 봐라.'하는 마음으로 전등 스위치를 누르고 밤새 모기채를 휘두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후자였다.


날이 선선해지면, 귓가에 들리던 애앵 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가을의 모기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느리고 힘이 없다. 여름이었으면 수백 번 손뼉을 쳐도 스치지도 않았을 것들이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손바닥에 힘없이 제 몸을 맡긴다. 뜨겁게 사랑했던 여름에 작별 인사라도 하듯, 마지막까지 발악이라도 하듯, 차가워진 공기를 피해 따스한 실내로 몰려든 녀석들은 흰 타일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남녀공용 화장실 좁은 칸 안 갇혀 뒤늦게 들어온 아저씨의 볼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허공을 바라보던 눈에 띄어버렸다. 조심스레 다가간 인간의 손바닥에, 몸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끈질긴 녀석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뭐라도 했을 놈들."

코끝이 시린 추위를 이겨내며 살아남은 녀석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탈탈 털어내 짧은 생을 마감하고 한 마리씩 변기에 버려졌다. 살짝 내린 레버가 만들어 낸 소용돌이 가운데 뱅글뱅글 돌며 그렇게 떠나간다. 어찌 보면 나보다 나은 삶을 살았을 그 녀석들의 뱅글뱅글 도는 모습을 보며 함께 뱅글뱅글 돌았다. 지금 내가 도는 것이 술에 취해 도는 건지, 소용돌이 때문에 도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TV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등장인물들을 본 적 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배우들은 마른 수건으로 와인 잔을 닦는 바텐더 앞에 앉아 능숙하게 양주를 주문했다. '늘 마시던 걸로.'라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꽤나 자연스럽다. 잔에 담긴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한 모금에 고민을 하나 삼키고 또 한 모금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셔츠를 풀어 헤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배우도 있었다. 병이 하나씩 늘어나며 머리카락도 옷매무새도 흐트러진다. 결국 다리마저 흐트러져 제 것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받는 게 인간이지만, 이렇게 한 번씩은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구나 싶었다. 동시에 포장마차에서의 혼술은 언젠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히 혼자가 되고 싶었다. 아, 물론 휘청거리는 건 빼고.


술집 앞을 지날 때 '혼술환영'이라는 문구를 종종 본 적 있지만 실제로 혼자 술 마시는 이를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술집에서 혼술하는 사람이 하나씩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워라벨을 찾고, 전염병이 돌던 그즈음부터였을까 혹은 그 전부터였을까.

그날 봤던 그도 그랬다. 그는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괴로워하지 않았다. 정말 단순히 '술이 마시고 싶어서' 왔다는 느낌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안주가 무엇인지 눈치 볼 것도 없고, 이미 한 얘기 무한 반복하는 걸 듣고 있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음 날 일어나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자신의 속도대로 마시는 그들은 조금 자유로워 보였다. 편안해 보였다

.

하지만, 저 사람도 술에 취하면 결국 전화번호부를 뒤져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까? 헤어진 옛 연인에게 '자니?'라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사라진 1을 보며 아침에 이불킥을 하려나. 흐트러진 모습으로 집에 갈 때 단숨에 달려와 줄 누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이에게도 누군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

비워져 가는 그의 술병을 보며 홀로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가을 모기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그는 사실은 혼자이기 싫을지도 모르겠다. 이불 속에 갇힌 여름의 모기처럼 시끄러운 이들이 부러울 수도 있겠지. 인간은 언제나 혼자이길 갈망하지만, 결국 함께여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이런, 가을 모기만도 못한 존재라니. 차마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을 해내고 있는 그들을 향한 질투였다.



뱅글뱅글 세상이 돌았다. 술에 취해 세상이 도는 건지, 잔뜩 예민해진 신경이 지구의 자전을 크게 느껴져 중력을 거스르기라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뱅글뱅글 돌던 모기들이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길 바라본다. 그리고 제 자리에 돌아와 무리 속에 앉으며 나도 언젠가는 혼술을 성공하길 소망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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