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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Oct 11. 2024

치과 치료 중엔 술 마시면 안 됩니다만

하얗고 반듯한 네모가 있었다. 각양각색의 모양과 색의 고철 덩어리들은 매끄럽게 그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온 나의 아빠의 것도 그 안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의 것은 반듯하지 못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도 아빠는 핸들을 잡고 있었다. 운전을 업으로 삼은 분은 아니었지만, 운전할 일이 많은 직종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큰 사고 없이 지내왔지만, 세월 앞에 무너지고 있었다. 주차라인 안에 삐딱하게 서 있는 아빠의 차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이렇게 부모님이 나이 먹어감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확인 절차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언제였던가, 친척 어른 장례식장에 갔다가 아빠와 나만 잠시 집에 가기로 했었다. 터덜터덜 흔들리는 지하철은, 장례식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공허함만큼이나 고독하게 느껴졌다. 그곳에서 아빠는 자리를 양보받았다. 갓 스물이 넘은 정도였을까. 훤칠한 청년은 냉큼 일어나 아빠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아빠는 서른이 되지 않은 딸에게 다시 자리를 양보했다.

처음이라 당황했을까, 딸 앞이라 머쓱했을까. 종점에서 반대 종점까지 가는 지하철 여행인데 앉아가면 좋지 않냐는 무심한 딸의 말에 아빠는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다. 내 눈에는 그냥 ‘아빠’였던 중년의 남자는 누군가의 눈에는 자리를 양보받아야 할 ‘어르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빠는 청년의 체온이 채 떠나지 않은 빈자리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쪽 이는 임플란트 하셔야겠는데요. 반대쪽은 신경치료 하셔야 하고요. 대공사 생각 하셔야겠어요."

분명 결혼 전에 대공사를 했는데? 세월 앞에 늘어나는 게 영양제와 주름이라면, 그 앞에 무너지는 건 관절과 잇몸인가 보다. 대공사를 했어도 십오 년 정도 지나면 그것들도 수명을 다한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한번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이는 내가 눈을 감게 되는 날까지 괜찮을 줄 알았으니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사십 대 중반을 달리는 지금,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불이 온몸으로 퍼지기 전에 치아보험을 알아보고, 잇몸 영양제를 털어 넣었다. 꺼져가는 불씨는 사라질지 커질지 아직 모르겠다.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한다. 하지만, 불씨는 조금씩 그 크기를 키웠다. 잇몸이 들떴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고, 차갑거나 뜨거운 걸 먹으면 이가 시려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걸 알면서도 잔에 술을 채웠다.

'미쳤구나, 이 와중에 술이라니.' 하는 생각과 동시에 '치료 시작하면 당분간못 마실 테니 지금 실컷 마셔두자.' 하는 양가감정에 휘둘렸다. 한 번에 위아래 사랑니를 동시에 뺀 날에도 맥주캔에 빨대를 꽂아 마시던 치기 어린 20대였는데, 하며 과거를 추억했다.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한강변에서 함께 캔을 부딪치던 친구들도 어느새 이에 나사 한두 개는 박혀 있더라, 하며 현재를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세월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아빠의 뒤를 따라 세월을 걸었다.




결혼하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훌쩍 자라 제 몫을 하고 있음에도 ‘아줌마’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발끈한다. 분명 아줌마가 맞는데, 기분이 나쁘다. 여자들이 가장 날씬하던 한순간을 제 삶의 표준인 것처럼 기억하듯, 혼인신고서를 접수한 지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길 바라는 건지. ‘아줌마’라는 단어에 이마 근육이 꿈틀거린다.

아직은 젊고 싶은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빠는 아직도 잔에 소주를 채운다. 이가 시려 찬 건 못 먹겠다 하시면서 땀이 송송 흐르는 한여름에도 실온에 보관한 맥주와 소주를 드신다. 미지근한 것들을 나누어주며 씨익 웃는다. ‘이렇게까지 해서 마셔야 해?’했지만 확실히 난 아빠 딸은 맞는 것 같다. 미지근한 맥주캔에 빨대를 꽂는다. ‘나도 이가 시려서.’하는 딸을 보며 엄마는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각자의 속도대로 목 넘김을 느낀다.




아빠를 위해 어르신 스티커를 주문했다. 초보운전 스티커도 안 붙였을 것 같은 아빠의 손에 '어르신이 타고 있어요' 스티커를 쥐여줬다. 아빠는 그 스티커를 붙이지 않았다. 자존심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스티커를 한 구석에 봉인시켰다.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서서히 핸들 잡는 일을 줄이고, 소주잔을 채우는 횟수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천천히 그의 속도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차마 당장 뺏을 수는 없었다. 위험하다는 잔소리로, 불안하다는 걱정으로 그의 청춘을 앗아오고 싶지 않다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은 좀 더 아빠와 잔을 기울이고 싶다. 미지근한 소주와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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