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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Dec 04. 2024

빨래 건조대 실종사건

지금의 집으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건조기가 없어서 빨래 건조대에 젖은 빨래를 말렸었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자꾸만 생기는 빨래를 빨고 건조대에 자주 널면서도 건조기를 경험해 본 적 없으니 딱히 불편함을 모르고 그게 그냥 당연한 줄 알았다. 이미 건조기를 사서 천국을 경험하는 엄마들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건조기를 구입한 거라며 이렇게 편한 걸 왜 안 쓰냐면서 당장 바꾸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신중한 남편은 그때가 건조기가 나온 초반이었기에 가스와 전기 건조기의 차이를 설명하며 조금 더 대중화되고 장단점이 분명해지면 그때 구입하자며 나를 설득했다. 입이 대발 나온 나는 주변에서 나만 건조기가 없다며 빨리 사 달라고 졸랐지만 남편은 꿈쩍도 안 했다. 무얼 하나 시작하려면 굉장히 꼼꼼히 따지고 분석하고 기다리는 에게는 건조기라는 뉴 프로덕트가 왠지 미심쩍고 아직은 불안정해 보였나 보다. 남들 다 한다고 똑같이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 없는 것 같은 소외감에 속도 상했다. 그렇지만 신랑 말도 일리가 있어서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무튼 건조기가 생기기 전까지 빨래 건조대는 열심히 제 역할을 했으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 시대는 막을 내리고 베란다에서 수년째 방치되는 신세가 되었다. 버리자니 멀쩡하고 깨끗한데 아까운 마음이 들고, 계속 쓰자니 건조기가 있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도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불쌍한 건조대. 어느 날 베란다를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단 문 밖에 두었다.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외출 후 집에 들어가려는 데 베란다에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혹시 건조대를 사용하지 않을 거라면 쪽지를 그대로 두고, 계속 사용할 거라면 쪽지를 떼어놔 달라는 거였다. 남긴 이는 아파트 청소 아주머니셨다. 아마도 복도를 청소하시다가 튼튼하고 키가 큰 건조대가 집 앞에 놓여있으니 혹시 처리할 거라면 달라는 말씀 같았다. 오, 처치곤란에 어떻게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손수 가져가주신다면야 나는 땡큐땡큐였다. 바로 포스트잇에 가져가셔도 된다고 적어 건조대에 붙였다. 다음날 아주머니가 보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가져가시겠지? 건조대야, 좋은 주인 만나 행복하렴.


다음날 오전 외출하고 들어오니 어라, 우리 집 건조대가 이렇게 낮았나? 그리고 왜 현관문 옆에 뒀었는데 방화 문 앞에 서 있는 거야? 유심히 건조대를 보았더니 청소 아주머니가 붙여 놓으신 쪽지와 내가 답장으로 쓴 메모지가 구겨지고 찢어진 채로 너덜너덜 붙어 있었다. 건조대도 우리 게 아니었고 누가 작은 걸로 바꿔치기하면서 쪽지도 버렸다가 아니다 싶어 다시 붙여 놓은 것 같은 느낌에 괘씸했다. 내가 분노하게 된 지점은 누군가 우리 집 건조대를 보고 마음에 들었는데 가져가라는 말을 써 놓았으니 자기네 거랑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게 아니다. 나와 청소 아주머니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본인의 이득을 차리기 위해 중간에서 가로챈 부분이었다. 나는 제3자에게 내 물건을 가져가라고 한 게 아닌데 아줌마가 가져가시기 전에 자기 걸로 바꿔 치기 해 놓고 쪽지를 버렸다가 양심상 그건 되겠던지 다시 붙여 놨다는 점도 어이가 없었다. 추측이지만 우리 집 건조대를 그냥 가져가고 본인 집 건조대와 바꿔 놓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집을 비운  어떻게 안 걸까? 분명 내가 집에 있었다면 우당탕탕 소리가 나서 다 들렸을 텐데 말이다. 가볍지도 않은 건조대를 가지고 이런저런 행동들을 했다는 점이 생각할수록 소름 끼쳤다. 건조대가 얼마 한다고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인 걸까? 도대체 누구일까? 같은 아파트 주민일까? 일단 건조대가 다른 거로 바뀌어서 청소 아주머니가 의아하게 생각하실 거고 내가 가져가시라는 쪽지까지 그대로 있으니 이걸로 바꿔서 가져가시라는 걸로 아실 수도 있으니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건조대를 바꿔간 사람을 꼭 알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바꿔 놓은 건조대에 새로운 메시지를 적었다. 다시 모든 걸 되돌려 놓으라고.


밤에 붙였으니 아침에는 무슨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주말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등교하고 나서 문을 열어보았지만 그대로였다. 월요일이면 청소 아주머니가 출근하실 텐데 마음이 갑갑해져 왔다. 그러다 오후에 외출하려고 문을 나서니 세상에, 우리 건조대가 방화문 앞에 다시 놓여 있고 제3자의 건조대는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닌가? 그가 내 쪽지를 읽었다! 온몸에 한기가 쫙 돌았다. 그리고 청소아줌마가 적은 쪽지와 내가 적은 메모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하니 겁이 나 바꿔 놓은 것이다. 아, 범인은 대체 누구인가? 다시 원위치해놓은 쫄보, 그대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자임에 틀림없다. 이럴 거 왜 가져간 건지. 나는 다시 아주머니께 건조대를 가져가시라는 쪽지를 붙이고 처음처럼 현관문 옆에 놓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데 으악, 벽에 기울여 놓은 건조대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확 고꾸라져버렸다. 쿵 소리를 내며 넘어진 건조대야, 너 요 며칠 고생이 참 많다, 미안해 다시 세워 줄게. 다시 제대로 세워 두고 외출을 떠났다. 근데 저녁쯤 돌아와 문 옆을 보니 건조대가 그 자리에 대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왜 아주머니가 안 가져가셨지? 서운한 마음에 건조대를 손으로 쓰윽 훑고 지나가는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보였다. 건조대의 위쪽이 부러진 거다. 아까 넘어진 충격으로 부서졌는급히 나가느라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한 같다. 그래, 이런 건조대를 아주머니께서 가져가실 리가 없지.


결국, 건조대는 남의 집에 갔다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지만 새로운 주인이 될 뻔한 청소아주머니의 곁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결국 내 손에 부러져 재활용분리수거장행이 되었다. 버리려면 빨리 버리고 누구를 주려면 빨리 주었어야 하는데 머뭇거리다 결국은 손상된 채로 버림을 당했다. 크고 튼튼해서 아주머니가 가져가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너무나 속상했다. 혹시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주머니가 가져가시려다 부러진 걸 가져가라는 이야기인 줄 아시고 황당하셨던 건 아닌지 그 부분도 마음에 걸렸다.


비록 결론은 엉뚱하게 흘러 청소 아주머니가 날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제3자 덕분에 내 것을 지킬 용기를 부려봤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다 넘어가는 지극히 평화주의자인 나에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일깨워준 그 방해꾼님에게, 마지막으로 씁쓸한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본다.


제3자님,

저희 집 건조대가 탐이 나셨다면 그냥 흔적을 남기지 말고 가져가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전 아주머니가 가져가셨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가져가고 나니 마음에 남는 찝찝한 부분이 있으셨을까요?

그렇다면 그냥 다시 제 걸 갖다 놓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왜 님의 건조대와 바꿔 놓으셨나요?

덕분에 전 감사합니다.

쓴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거든요.

그리고 아닌 것에는 당당히 아니라고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마음 가득하지만 남들에게는 러지 마세요.

이제 님도 그러지 않으시겠죠.

저와의 일로 많이 뜨끔 하셨을 테니까요.

반성하신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이번 해프닝은 그냥 넘어가드릴게요.

부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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