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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y 08. 2024

골목길 끝으로 사라지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서로 다른 생의 주기를 살아간다는 것

5월 8일. 전국의 불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날이다. 365일 중에 딱 하루이니, 할만하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치솟는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몇 년째 동결이다. 올해도 뻔한 돈 봉투와 가성비 좋은 선물을 사 들고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효녀 효부 놀이를 했다.

“할머니! 이거 내일 외할아버지 집에 갈 때 좀 챙겨줄 수 있어요? 이건 드실지도 몰라요.”

딸아이는 효녀 시늉만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우리 사랑이 다 컸네. 외할아버지가 밥을 잘 안 챙겨 드시니까, 이거라도 드리고 싶구나? 할머니가 꼭 챙겨 놓을게.” 

“어머니, 챙기지 마세요. 배도라지즙 안 드세요. 영양제도 수없이 버렸어요.”

무심한 듯 말했지만, 어린 손녀까지도 신경 써야 하는 아빠의 처지가 아프고 속상했다. 

“혼자 있을수록 스스로 자기 몸을 챙겨야지.”

아빠가 준 사랑의 만 분의 일도 돌려주지 못한 미안함은 이상하게도 항상 뾰족한 말로 튀어나와 나를 찌른다. 1년에 몇 번 겨우 만나면서도, 더 따뜻하게 그를 챙기지 못하는 좁쌀만 한 내 마음과 재정적, 육체적 한계 상황에 화가 나는 것이다.      




후회와 죄송함이 안개처럼 마음에 내려앉는다. 집에 돌아와 『초록 거북』이라는 책을 꺼냈다. 아빠 거북과 아기 거북의 이야기다. 아빠 거북은 아기 거북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기 거북은 그럴 때마다 울먹거리며 토라진다. 처음에 아빠 거북은 화가 났지만 아기 거북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이후로는 서두르지 않는다. 아기 거북은 항상 아빠 거북의 지지를 받으며 자랐다. 시간이 흘러 아기 거북은 어른이 되었고, 어느덧 아빠의 역할을 대신하며 아빠를 돌봐주는 자리에 서게 된다. 어릴 적 아빠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배움을 다시 아빠에게 돌려주며 살아간다. 


아빠 거북은 아기 거북의 눈물을 본 이후로, 아기 거북을 키우면서 그의 속도와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한다. 아이의 속도와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익숙한 말이지만, 실제 그것을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딸아이가 6살 때였다. 파란색 물감을 칠해놓고는 이게 무슨 색인지 물었다. 

“파란색! 이쁘게 잘 칠했네!”

활짝 웃으며 솔 톤으로 칭찬까지 했으니, 그녀의 반응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치... 다른 엄마들은 보라색인가? 하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도 해준다던데...”

내 눈에 보이는 색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달랐을 리 없다. 딸아이는 정직한 대답이 아니라, 그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답을 원했던 것이다. 시무룩한 딸아이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이의 속도와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단순히 밥 먹는 속도나 걸음의 폭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표현, 그때의 분위기까지 맞춰가는 것임을 그때 깨달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개인적인 성향만큼이나 시간과 경험의 격차만큼의 거리가 늘 존재하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공간은 격려, 이해, 용서, 존중, 공감, 경청, 대화로 연결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기 거북이 아빠 거북의 눈높이와 속도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빠 거북은 어제 할 수 있던 일을 오늘 할 수 없게 되고, 기억마저 점점 흐려져 간다. 아기 거북은 오랫동안 자신의 보호자였던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일은 막중한 책임과 불안이 따르는 부담이다. 최선을 다해 부담을 짊어지지만, 부모님에게 받은 것을 결코 온전히 돌려드릴 수 없다는 뼈아픈 사실에 씨름해야 한다. 


연로해진 부모에게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가능한 것은 ‘할 수 있는 일’뿐이라는 말이 있다.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 역시 아버지의 행동이나 말을 고치려고 애쓰는 대신, 그것이 그에게 위험하지 않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아버지의 인생의 자리에 잠시 앉아,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더욱 편안해진다. 때로는 부모와 자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에 새로운 친밀감이 꽃 피고, 그 향기로움 속에서 따뜻한 위로를 얻는다.       




단순한 그림과 대화로 이루어진 소박한 페이지 안에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이해, 연민, 서운함 등의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차오르는 눈물을 말리려 안간힘을 썼다. 허무하게도 왈칵 수문이 터진 순간이 있었으니, 어느 봄날, 아들을 따라나선 아빠 거북이 크게 다친 상황에서의 대화였다.

“아빠, 많이 아파요?”

“하나도 안 아픈데.... 무서워.”

“점점 네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단 말야.”

극도로 연약해진 아빠 거북은 아들 거북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두려움과 불안을 드러낸다. 나이가 들면서 직면하는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했다. 피할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이 얼마나 서럽고 두려웠을까. 그런 아빠 거북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아기 거북과의 다정한 순간을 놓치게 될까 하는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녀와 공유하는 모든 찰나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육체적 고통보다 자녀와의 소중한 시간을 놓치게 될까 봐 무섭다는 말이 가슴 조이듯 와닿는다. 


아빠 거북이 자신의 깊은 불안을 아들에게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아들 거북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게는 좀처럼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 친정 아빠가 생각났다. 그는 아프거나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올 때도 덤덤한 척 괜찮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의 유대감이면 아버지의 마음을 열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솔직한 그의 마음을 마주하는 게 두렵기도 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아프다. 힘들다. 외롭다.”라고 말하면 나는 무너질 것 같다. 나는 영원히 아빠에게 아이로 남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아들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다시 아들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섭리가 이토록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룽잉타이의 『눈으로 하는 작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와 자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점차 멀어지는 서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별하는 사이가 아닐까. 우리는 골목길 이쪽 끝에 서서, 골목길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 뒷모습이 당신에게 속삭인다. 이제 따라올 필요 없다고.”

따라와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네가 너무 필요하다고 매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가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금욕적인 결의로 슬픔을 숨긴다. 자식은 부모의 말에 담긴 진한 설움을 알지만, 모르는 척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붙잡고 싶지만 놓아버리고도 싶은 모순된 감정에 휩싸인다. 그렇게 사라지는 서로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이별한다. 서로 다른 생의 주기가 이렇게 아픈 것인가. 가슴을 쥐어짜며 한참을 울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본다. 아빠의 머리에는 은빛 눈이 내린 지 오래다. 넓었던 어깨는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구부정하고, 깊게 팬 주름은 그동안 맞서 싸운 전투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깊어진 그의 눈에는 숭고한 사랑이 일렁이고, 굳게 다문 입술에는 말할 수 없는 설움이 담겨 있다. 거칠어진 굳은 손에는 덤덤한 희생의 시간이 젖어 있고, 두꺼워진 발에는 자부심이 깃들었다. 무자비한 세월 속에 그가 닳아 없어지지 않은 게 감사할 뿐이다. 


남은 시간은 그와 함께 붙잡는 것과 놓아주는 것을 계속해서 연습하게 될 것이다. 놓는 것을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겠지만, 놓는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너무 슬퍼 말아야겠다. 그의 보폭에 맞춰 걸을 수 있는 순간들에 감사하며 제한된 시간을 아름답게 맞이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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