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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Jan 25. 2024

아프냐, 나는 힘들다.

방학 9일 차

삑-!  삐익-!!

새벽 2시. 거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잠이 깼다.

'쏴아아~ 딸깍. 탁탁 탁탁'

빠르면서도 발 뒤꿈치까지 세게 닿게 탁탁 걷는 소리가 들린다. 빠르고 큰 소리라면, 2호가 일어났나 보다.

'쟤가 왜 이 시간에 일어났지? 화장실이 급했나?'

눈을 비비며 움직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혼자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오길래 '그럼 그렇지~' 하고는 다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계음을 듣고는 이불을 바로 걷어내고 일어났다.

"2호야, 왜? 어디 아파?"

화장실 불빛에 눈을 찡그리며 체온을 확인하고 있는 2호에게 말을 걸어본다.

"더워서 열나는지 보려고 체온 쟀는데, 정상이야. 36.4"

"많이 더워? 어머 얘, 식은땀 나는 것 봐."

아이의 얼굴은 노란 불빛 때문인지 빨갛게 보이지 않아, 열감을 느끼기 위해 손을 이마에 얹자 손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얼른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아이의 머리와, 몸을 닦였다.

"2호야. 더운 거 말고 아픈 건 없어?"

"몰라. 귀찮아. 잘 꺼야."

"모르면 어떻게 해. 말을 해 줘야 약을 먹고 자지."

"안 아파. 그냥 더워. 나 소파에서 자도 돼?"

이 녀석은 엄마의 애태우는 마음은 관심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자기 말만 하더니 소파에 벌러덩 눕는다. 요 며칠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터라 내가 옮긴 게 아닐까 싶어 미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더욱 친철하고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질문했건만, 아픈 것도 아니고 귀찮다는 이유로 성의 없이 대답하다니.. 차라리 갑자기 더 아픈 척 어린양을 부리거나 우는 게 낫지, 이제 다 컸다고 이따금씩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일 때에는 낯설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사춘기 직전인 1호도 아니고 아직은 토끼 같은 귀엽기만 한 2호인데, 네가 벌써부터 그러면 반칙이지~!! 그래,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 걸로 하자. 말하는 태도 보아하니 많이 아프진 않나 보네.. 그래. 그렇다 치자.

아프지 말자.

아이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요 며칠 잠을 못 자서 까칠한 호랑이는 털끝을 바짝 곤두세우려다 식은땀과 덜덜 떠는 입술을 보고는 이내 꼬리를 내렸다.

"침 삼킬 때 목 아파? 기침은? 코는 안 막혀? 한쪽씩 막아서 숨 쉬어봐. 머리는 안 아프니?"

"목은 조금 아파. 기침하느라 깬 거야. 코는..... 흐읍 슈웅 ~ 흐읍.. 한쪽만 막히네. 이제 됐지? 나 이제 잔다."

아이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많은 질문에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고는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눕는다. 이불이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끙끙 앓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오한과 몸살이 왔나 보다. 열만 없지 다른 호흡기 질환과 통증이 심했던 며칠 전의 내 증상과 똑같아 보인다. 하아.. 전염이 확실하다. 나름 조심한다고 집에서 마스크까지 쓰고, 수시로 손도 그렇게 자주 씻었는데 결국엔 옮았구나. 이번 감기 바이러스는 진짜 독해서 며칠은 죽을 만큼 힘들던데 어쩌니... 바이러스를 옮긴 미안함과 제대로 방역을 하지 못한 후회가 주방 공기로 가득 채웠다.

"하아... 큰일이다..."

우선 집에 있는 약들을 살피며 아이의 증상에 맞게 챙겨 먹였다. 10분 간격으로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는 아이 옆에서 부채질과 이불을 덮어주는 일을 반복하며 틈틈이 1호는 괜찮은지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살피다가 창 밖이 밝아짐을 알아챘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느낌이 오래된 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 몹시도 반가웠다.

이런 날이 다신 안 올 줄 알았는데...
아직 우리 애들은 내 손이 더 필요했었네...

코를 골며 방에 있는 공기를 다 마실 것 마냥 입을 벌리고, 큰대 자로 자는 녀석의 볼을 어루만지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매번 알았다고, 알아서 한다고 잘난 척을 그렇게 하더니...'




해가 중천에 뜨자 "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네" 하며 아저씨처럼 몸을 긁으며 나오는 2호(강조! 이제 10살 되었음.)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본다. 그러자 본인도 민망했는지 시계를 계속 확인하며 놀란 척을 한다.

"어? 왜 이렇게 밝아졌어? 뭐야,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는 거야?"  

"어. 그러니까 빨리 씻고 와. 아점 먹고 병원 가게."

"오늘 아침 뭔데?"

"누룽지, 장조림계란볶음밥, 된장국에 밥이랑 반찬. 뭐 먹을래?"

"난 장조림에 계란볶음밥. 거기에 김치볶음 추가요."

화장실에서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코와 목이 많이 잠겨있다.

"얼른 먹어. 아까 세수는 했지? 양치만 하고 바로 병원 가자. 조금만 늦으면 점심시간이랑 겹치겠어."

"아, 좀 기다려. 먹고 있잖아. 집 밥은 빨리 먹는 게 좀 힘들단 말이야."

"왜 힘들어, 목이 아파서?"

"아니 그게 아니라. 밖에서 먹는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불러서 많이 못 먹거든?

근데 집밥은 신기하게 계속 들어가. 그래서 많이 먹게 돼. 지금도 이것 봐. 벌써 한 그릇 다 먹었잖아.

나 더 먹을 거니까 엄마는 가서 준비하고 있어. 여긴 내가 알아서 먹고 정리할 테니까."

누가 환자고,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다. 연신 기침도 하고, 코가 막혀서 입으로 숨도 쉬고 밥도 먹어야 해서 헉헉 거리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는 쉬지 않고 한다. 하긴 요즘 한창 식욕이 올라 뒤돌아서면 배고파하는 녀석이 자느라 오전 내내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능글맞게 집밥이 신기하다며 맛있게 먹는 저 사내가, 어젯밤 기운 하나 없이 쓰러지듯 자던 그 아이가 맞나 의심이 든다. 그도 이런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오해받기 싫다는 양 잠깐의 틈새만 생기자 중환자인양 드러누워 끙끙 거리며 춥다고 덜덜 떨더니, 잠시 후에는 덥다고 베란다를 나가서 잠을 자고 있다.

 이젠 더 이상 무거워서 안을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집에서 가장 무거운 이불을 두 겹으로 덮어주자 씩 웃는 능구렁이 녀석. 아, 진짜 내가 졌다. 병원은 이따 오후에 가야겠다. 매번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10살을 보며, 나는 하루에도 열댓 번씩 화가 났다가, 웃었다가, 속상했다가, 감동받기를 반복한다.




 태어나자마자부터 봐주신 덕에 2호의 모든 히스토리를 아시는 소아과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평소와 다르게 단번에 항생제를 처방해 주셨다. 평소 아토피와 비염이 있어 장기간 먹고 있는 약이 있기에 호흡기 질환은 웬만해서는 항생제 없이 버텨보자 하시는 분인데 진짜 아프긴 한가보다. 이런 엄마의 걱정반 속상한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환자 아들은 약을 먹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집에 오자마자 장난감 칼 두 자루를 들고 침대 위에 올라가 홍길동 놀이를 시작했다.

 "정의는 너희를 용서할 수 없다!"

또 어디서 명대사를 보았나 보다. 정의건 뭐 건간에 그런 허세 부리지 말고 잠이나 좀 잤으면 좋겠다. 분명 약사님이 졸린 약이랬는데 약을 잘 못 받아온걸까?

제발 하루에 한 콘셉트로만 있었으면 좋겠다. 적응이라도 할 수 있게. 천하의 전우치도 너처럼은 안 돌아다녔을거다!! 아픈 애한테 잔소리하기 싫어서 참고 또 참고 또 참다가 결국은 잔소리를 장전했다. (참을 인 3번 썼음)


아들아, 아프면 약 먹고 자고, 하루종일 누워서 조용히 쉬는 거야.
우리 지금 엄청 아픈 거래. 대체 우리 집은 언제쯤 조용히 쉴 수 있는 거니??

결국 아들보다 먼저 아프고, 아직 덜 나은 나는 오늘도 영혼이 몸보다 먼저 탈출했다.

힘들어서 아픈 건지. 아파서 힘든 건지 모르겠지만 시작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냥 하루라도 푹 쉬어서 모두 말끔히 싹 나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만 좀 하라고 소리도 지르고, 밖에 나가서 '너희 들은 뛰어놀아라, 나는 여기서 조용히 멍하게 있을 테니' 하며 모르는 사람인 척도 해보고 싶다.


속상하고 괴롭다면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리는 게 나아요. 내 성격의 모난 부분도 이 나이가 되도록 어쩌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이 성격을 바꾸겠어요.
- 아이의 소신 두 번째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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