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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Apr 12. 2024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진은영 시인의 멜랑콜리아

(출처 진은영 시인의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 지성 2008)


이번에 내가 벼른 게 있다면 절대로 긴 시를 고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진은영 시인의 우리는 매일매일이란 시집을 펼쳐봤다. 사실 내 책장에 있는 시집들은 대개 대학생 때 산 것들이고 그것들에는 대놓고 낙서한 글귀들이 많다. 내 것이란 소유물 의식이 있어서 그럴까. 되게 옛 낙서들을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그때는 내가 저렇게 낙서를 했구나 헛웃음도 난다.


나는 당시에 저 멜랑콜리아란 시를 되게 좋아했다. 단어가 주는 색이 마음에 들었고, 간결하지만 밝은 톤의 팝아트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아이스크림 하니까 김지녀 시인의 기린과 나도 떠오른다. 그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주제였다면 여기 멜랑콜리아는 그와 나의 연애사가 주제 같다. 나에게 연애란 처음에는 달달하지만 끝에 가서는 입안이 써지는 그런 맛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다 맞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같이 있는 시간 동안 확인하고 인내하는 것이 내가 한 연애였다.


대학생 때 내가 딱히 연애경험이 없었음에도 이것은 재미있게 읽혔다. 우리는 연애를 꼭 사람에게 배운다기보다 드라마 혹은 책으로도 간접경험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티브이에 나온 부부 토크쇼 혹은 당장 부모님만 봐도 '연애 때는 이랬던 양반이 지금은 이런다~'라는 얘기를 쉽게 접하니까 말이다.



멜랑콜리아


                진은영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출처 진은영 시인의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 지성 2008)



타이핑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이렇게나 짧다니. 그럼과 동시에 사이사이에 들어간 은유들이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다. 제목 멜랑콜리아를 네이버 사전은 무쾌감증, 불면증, 정신 운동의 변화, 죄책감 같은 심한 우울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우울한 감정이다. 우울증이란 단어 대신 세련되고 감각적이게 표현한다고 '내 기분이 멜랑콜리해.'라고 말하는 게 한때 유행했던 것 같다. 어쩐지 우울증은 한 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지만, 멜랑콜리아는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인정하면서도 산뜻하게 웃어 보이는 듯한 착각에 들게 한다. 이 시에서도 남녀의 이별에 대한 내용이지만 어쩐지 그에 대한 비꼼도 한 스푼 들어간 듯하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갔다는 허망함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첫 문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그라는 사람이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고 한다. 이 말은 뒤에 나오는 아이스크림이 녹아 바닥에 흘린 것을 문맥 그대로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일 수 있다. 그런 면도 있지만 어쩐지 그가 나를 달콤하게 바라봤고 달콤하기를 기대했다는 말로 들린다. 사실 사랑을 처음 할 때 그 상대가 분노조절장애나 혹은 괴팍한 사람이라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다정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호감이 생기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가 나를 달콤하게 그렸다는 것이 문제적인 행동은 아니지만 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람은 달콤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여기서 나는 아이스크림이다. 차가워야 할 아이스크림이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놀랄 일일까. 아이스크림이 녹을 정도로 뜨거운 '햇빛'의 문제일까. 아니면 날이 뜨거운 것을 알고도 빨리 먹지 못한 그의 '부주의함' 때문일까. 무엇이 문제가 되었든 간에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라는 비극적인 서술이 있다. 여기서 닿고 싶은 상대는 '그의 부드러운 혀끝' 같은데 닿지 못함에 좌절하고 씁쓸해하고 있다. 어쩌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이스크림 같은 나의 마음을 누군가 녹였지만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도도하지는 않았지만 말 수가 적고 표현이 없는 무감각한 여자이기는 했다. 나도 저렇게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었나, 떠올려보니 복학생 오빠가 떠오른다. 같이 수업을 들으며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지고 상대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그렇지만 더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이었고 그렇게 서로 별 다른 말 없이 멀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여기 시에서는 '나'는 준비되어 있지만 아직 '그'는 준비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게 말로만 듣던 어장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뒤에 구절을 읽어보니까 서로 마음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남녀가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게 대단한 우연과 인연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그가 늘 나 때문에 슬퍼했다는 것은 잦은 다툼이 있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아까는 아스팔트였다면 그와 유사한 모래사막을 시인은 들고 왔다. 둘 다 건조하고 뜨겁다는 특징이 있다. 일단 그는 나를 이미 '모래사막'에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감정이 있다. 그가 한 행동이 마치 '사람은 쳤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열받는단 말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나타난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유부단한 것이 어느 하나를 결정하지 못하는 게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그 유한 성격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한 행동에 굉장한 모순이 있다고 느낀다. 자기가 물고기를 모래사막에 그려놓고 슬퍼한다니. 뒤늦게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알고 슬퍼하는 모습에 '그래. 측은지심이라도 있잖아.' 하며 생각해야 하나. 애초에 그는 왜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게 되었을까. 그가 사는 세상이 모래사막인가. 그는 모래사막 같이 무미건조하고 감정 표현이 서툰 인간이었을까. 모래사막 같은 그와 아이스크림 같은 나의 연애라니. 듣기만 해도 벌써 슬프다. 이 정도면 로미오와 줄리엣 아닌가.


어쩌면 그의 성격 중에 건망증이나 물건 놓고 다니는 버릇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려놓은 것이 물고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한 것이다. 아니면 첫눈에 반해서 나를 만났지만 알고 보니까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여자였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게 무엇이 맞든 간에 큰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자유지만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책임이기 때문이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여기서 '사막을 지나는 바람'은 그에게 무엇일까. 그의 다짐이나 결정 같은 것일까. 모래사막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널 보내줄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아무튼 그는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나를 지워줬다. 더는 고통에 펄떡이지 않아도 된다. 고통을 보는 사람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다 모래바람에 덮어서 사라졌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워준다'는 '헤어진다' 같은데 정말 헤어지면 다 없던 일이 되는 것일까. 기억을 지운다고 과거에 있던 일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이 마지막 행에 아주 나이스하고 유쾌하게 나와있다. 내가 이래서 진은영 시인의 시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는 정말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네이버 사전에서 낙관주의자는 세상이나 인생을 희망적으로 밝게 보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아이스크림으로 그린 물고기 같은 여자를 모래사막에서 지우고 나서 그녀가 바다로 갔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하늘나라로 갔다고 믿는 6살 꼬마애를 연상시킨다. 내가 제목에는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이라고 지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에서 나타난 태도 혹은 온도일 뿐이다. 지금 내 온도는 너무 뜨겁다. 내가 시를 읽고 감상을 쓰면서 이렇게 흥분되게 혹은 나라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앞에 나와서 쓴 적이 드문 것 같다. 물론 다 내 입장에서 썼지만 이 멜랑콜리아 시를 쓸 때는 인간 나로 썼다.


사실 마지막 구절을 보면서 그런 것도 떠올렸다. 사귈 때는 서로 자기 할 말을 고집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끝날 때는 좋은 말만 골라서 했다. 그러니까 '잘 살아. 좋은 여자 만나고. 행복해.' 이 정도로 상대의 앞날에 대한 행복을 기원해 준다. 어차피 끝나는 마당에 나쁘게 욕할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도 사막에 그린 물고기 같은 '나'도 바다에 갔다는 의미는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도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반건조 오징어가 물에 간다고 다시 생물 오징어가 되나. 그건 아니다. 여기서도 사막에 한 번 간 물고기가 아무리 놓아준다고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몸에 새겨지는 상흔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게 '그'의 관점은 어떤 것일까. 타인을 달콤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고, 타인의 감정은 잘 눈치채지 못하지만 슬픔에는 공감할 줄 알고, 자신이 한 실수를 만회하려고 사막바람을 불러다가 지워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물고기 같던 그녀가 자신을 떠나 바다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한 인간 자체는 '선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가 '그'에게 빠져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절대 악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을 프레임 씌워 보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게 보편적인 일이다.


이들 역시 보편적인 사람들이 만나 보편적인 연애를 한 것이 아닐까. 서로 달라서 끌렸지만 서로 달라서 파국을 맞이하게 된 멜랑콜리아 같다. 정말 짧은 시지만 내 감정은 많이 휘몰아쳤던 시로 기억될 것 같다. 대학생 때는 그냥 이미지가 세련되고 이쁜 시구나 정도였는데 신기하다. 역시 시든 책이든 영화든 여러 번 보면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짧으니까 너무 행복하다. 뭔가 한 것 같지만 큰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았다. 근데 너무 짧으면 또 할 말을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여기서 더 짧은 시를 찾아서 다음에 돌아오겠다. 그 시집은 좀 함축적이고 한자 단어가 많다. 그때 시인 이름만 믿고 철썩 같이 샀는데 정말 나중에 후회를 엄청 했다. 나랑 결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또 시는 시라고, 어떤 시는 내 마음에 들었는지 옆에다가 하트 표시도 해놨더라. 사실 브런치에 시를 읽고 무엇인가를 적는 게 의무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 편으로는 이 시간이 내게는 한 편의 시 혹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이라 내게 더 재미있는 일 같다. 내가 낙서를 할 때 어떤 이미지를 찾아 이 색 저 색 골라서 쓸 때의 감정을 여기서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의 유무와 별개로 내가 즐긴다면 그 자체로 유익한 취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제 나도 저 진은영 시인의 멜랑콜리아 같은 극적인 연애 말고 나뭇잎처럼 잔잔하고 잘 고정된 나무 같은 연애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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