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나는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좋아한다. 기형도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 시인의 깊고 묵직한 밀도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은 꽤 내게 따뜻한 온도였으며 때로는 쓸쓸하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가 기형도 시인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싶다.
기형도 시인의 시 중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질투가 자신의 힘이 되었노라고 말하면서도 뭔가 텅 빈듯한 마음을 잘 그려놓은 시가 상반되는 것 같아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그리고 빈집이라는 사랑 시도 좋고, 엄마 걱정이라는 유년시절 엄마를 기다리던 순간의 시도 정말 좋다.
그런 그의 시 중에서 대학시절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난 이미지가 있는 시를 좋아하며, 동시에 쓸쓸함이 공감이 가는 시를 좋아한다. 그래서 골랐다.
나의 대학 시절은 어땠을까. 진짜 말도 없고 조용히 수업 듣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이 기형도 시인의 마지막 구절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가 아주 공감이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그 막막함. 사실 이 시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있는 1980년대니까 지금 내 감정과는 깊이적으로 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이 시를 더더욱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나무의자 밑에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사실 대학교를 졸업하면 당근에 전공서적을 내놓고 팔기도 하며, 고등학교 시절에 여학생들이 수레에 한가득 책을 싸놓고 소각장에 버리는 것도 보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버려진 책'들은 어쩐지 슬프고 조용하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깊고 아름다운 숲 속에서 나뭇잎이 무기로 사용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나뭇잎 하면 일본 만화 나루토가 떠오른다. 거기 나뭇잎 마을이 있다. 근데 사실 현실에서 나뭇잎이 무기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화자는 지금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중략)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목련철은 4월이라고 한다. 4월. 죽음. 친구들이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고백했다. 기관원은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교수는 원체 말이 없다고 한다. 그 교수는 화자가 존경은 하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고발할 수 없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이런 아이러니함 속에 피어나는 슬픔이 난 꽤 마음에 든다.
시 곳곳에 '아름다운 단어'와 '비극적인 단어'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청년들은 눈 감고 지나가고, 돌계단에서 플라톤을 읽고, 그러면서 어디선가 총성 소리가 들린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의 폭력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기형도 시인의 대학시절은 아름다우면서도 무섭다. 나는 유화를 되게 좋아하는데, 뭉개져있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암울한 초록색 숲이 떠오른다. 나의 대학시절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으로 미화되고 있는데 이 화자의 대학시절은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설경구처럼 말이다.
그리고 방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형도 시인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시에 녹여낸 것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시와 시인은 분리시켜야 한다지만 때로는 아주 밀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입 속의 검은 잎_기형도, 문학과 지성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