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내가 건넌 밤의 흔적
1년 전, 10월
악몽이 한동안 사라진 줄 알고 안도했지만 잠깐이었다. 잠들라치면 몸은 제멋대로 버둥거렸다.
가끔은 괜찮아 보이다가도, 또 어떤 날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따로일 수 있을까 싶었다. 악몽을 급하게 이겨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짐해 놓고도 다음날이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낮의 햇살 속에서 웃고 있으면서도 어제의 공포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나에게 잠이란 ‘쉼’이 아니라 ‘추락’이었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 검은 물결에 삼켜졌다. 몸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고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겨웠다. 이완은 커녕 공포가 더 깊어졌다.
매일 "깨어 있는 악몽" 이자, 몸이 기억한 공포의 재방송 같았다. 나는 다시 시험당했다. 이게 회복의 전조인지, 고통의 잔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열이 내려가던 그 시기, 남은 건 악몽뿐이었으니.
“아, 이렇게 살아서 뭐 해.”
몸은 버티려 했지만 마음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절망은 순환했고 회복은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음은 매번 깨졌다가 다시 붙는 일을 반복했다. 이젠 무너지는 게 일상이고 절망이 루틴이 됐다.
다른 사람들은 희망을 키우라지만 나는 절망을 정성껏 길렀다. 그래야 내일 또 버틸 수 있으니까.
희망을 품을 여력이 없을 만큼 지쳤지만 절망마저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그것’만 걷히면 내 삶에 다시 햇살이 들 줄 알았다. 아프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나를 다시 끌어안아 줄 거라 믿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하늘이 쪼개지듯 무너졌다.
내가 의지해온 모든 회복의 공식이 함께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은 몸보다 훨씬 더디게 나았고 회복은 늘 얌전하게 끝나지 않았다.
상처가 아물어갈수록 가려웠고 그런데 그 불편함이야말로 내가 다시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회복의 통증은 퇴행이 아니라 재생이었다.
그런데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엎질러진 게 컵인지 내 마음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며칠씩 눕다 보면, 세탁기 속 옷들처럼 내 감정도 정신없이 방향을 잃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바닥을 쓸었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찾느라 하루를 다 썼다.
몸의 회복은 가능했다. 그러나 마음의 회복은 언제나 변수였다. 인생은 방정식이 아니라 미분이었고 흔들림과 경사를 타며 나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햇살은 걷히는 게 아니고 내가 조금씩 받아들이는 거라는 걸 알았다. 삶은 언제나 나를 끌어안는 대신, 감싸 안는 법을 묻고 있었다.
악몽의 기록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나를 바라보며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 사이를 건너가고 있었다.
확실한 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과 다시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100% 의지하고 있었다. 그분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의미를 찾았다. 그만큼 나는 내 몸을, 내 회복을, 내 선택을 전부 그 손에 맡기고 있었다.
그게 믿음이라 생각했다.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 믿음을 정성껏 키워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치료가 길어질수록 그런 내가 너무 한심했다.
왜 나는 나 자신을 때론 믿지 못했을까.
왜 내 몸의 신호를 외면한 채, 늘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안심이 되었을까.
주치의 선생님은 분명 최선을 다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 ‘최선’ 뒤에 숨어 있었다.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점 작아졌다.
결국 ‘나’라는 자리를 비워두고 모든 걸 맡겨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진심으로 믿고 잘 따라왔는데도
정작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은 적도 있었다.
병원에 가지 않던 서울에 있었을 때는 내 몸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고통을 해석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냥 주어진 처방을 따르고, 하라는 대로 움직이며 그게 최선이라 믿었다.
그러다 맞다! 하면서 무릎을 쳤다. 나는 병을 이겨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 나 대신 이겨주길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왜 이렇게까지 나를 놓아버렸을까.
내 회복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던 걸까.
그건 절망이라기보다, 나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공허함에 가까웠다. 몸은 치료받고 있었지만 마음은 지쳐 방치되어 있었다.
누구의 손이 아니라, 내 손끝에서 조금씩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치료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였고 그 관계의 한쪽은 언제나 ‘나’여야 했다.
나는 다시 나를 믿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자율신경 실조증, 특히 만성통증은 급성통증과는 달리 긴 시간을 요하는 치료다. 몸이 나아가는 만큼 마음도 함께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원장님은 어쩌면 그 소박한 숙제를 통해 알려주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함께 기뻐해주고 나눌 수 있어서 온전히 살아 있음을 느꼈다. 재발과 불확실한 내일은 잠시 잊고
지금 이 순간의 빛과 따뜻함 속에 스스로를 맡길 수 있었다.
인간에게 언어는
‘생각'이라는 집을 짓는 벽돌과도 같다.
주치의 선생님 글에 무척 공감되었다. 언어가 없으면 개념화가 어렵고 개념이 없으면 복잡한 내적 세계를 짓기 어렵다. 언어는 생각의 골격을 세워준다. 그 벽돌의 말투, 은유, 어휘가 집의 튼튼함을 결정한다.
긍정적인 언어로 쌓은 집은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지만 부정적인 언어가 반복되면 곧 금이 가고 무너져버린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니다. 나는 설명하고 정리하려는 욕구는 강했지만 통증은 늘 언어를 갉아먹었다.
아플 때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표현은 단편적이고 반복적이었다.
고통이라는 단어 안에 갇혀 사는 날들이 많았다.
언어의 벽돌이 부실해지니 생각의 집 전체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만들어낸 틀 안에서 고통이 더 고착되고 회복이 늦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언어의 윤리와 치료적 기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의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의사가 환자나 가족에게 내리는 한마디가 누군가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있다.
그만큼 언어의 무게는 현실의 고통보다 더 무겁기도 하다. 나도 누군가의 억장을 무너뜨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되돌아보았다.
십 년도 넘은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치료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나는 되물었다.
“그럼, 상급병원 의뢰서를 써 주시겠어요?”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여기서 치료할 수도 있는데” 하고 말을 흐렸다.
같은 사실이라도 “상황이 쉽진 않지만 함께 치료 계획을 세워보죠.” 이렇게 전했다면 어땠을까.
괜찮을지도 몰라!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병원에 자주 다니다 보니 좋은 언어는 감정의 방향을 바꾸고 의사의 태도가 회복의 속도를 결정해 주었다. 마음과 몸에 직접 닿아 상처를 덧내기도 하고 봉합하기도 하는 하루치 약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 너무 섬세해서 그래, 그냥 흘려들어”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이 약해서, 내가 예민해서만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늘 “말을 예쁘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땐 예의범절쯤으로 여겼지만 예쁜 말은 상처를 덜 스며들게 하는 연고이고 거친 말은 마음의 피부를 벗겨내는 사포였다. 누군가의 하루를 망가뜨릴 수도, 다시 살아보게 할 수도 있는 게 말 한마디다.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 마음 또한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언어를 더 따뜻하게 고를 수 있으면 좋겠다.
통증이 나를 지배한다는 말과, 통증이 나와 함께 있다는 말은 같은 사실이지만 삶의 전개를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말이 사고를, 사고가 태도를, 태도가 회복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그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
통증은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통증이 함께 있을 뿐이다.
내가 주치의 선생님께 더 신뢰가 갔던 이유는 좋은 언어만 쓰셨기 때문이다. 의도적 어휘 교체라는 작은 기술(?)을 배웠고 언어를 얼마나 예쁘게 다루시는지도 자주 느꼈다.
내가 “저는 망가졌어요.”라고 말하면 언제나 “특별해요! 잘하고 있어요..”라고 부드럽게 다시 고쳐주셨다.
“통증이 지배한다” 대신 “통증이 함께 있다”라고 표현을 바꾸는 일, 그 작은 인식의 변화가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통증이 나의 주인이 되었다면 나는 절망의 집에 갇혔을 것이다. 하지만 통증이 함께 있다는 말은 달랐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감사와 안도, 작은 승리의 언어들이 원장님과 지금까지 주고받은 메시지 속에 다 들어있다.
돌아보니 그 모든 언어들이 치료였고 긍정의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여 내 마음의 집을 받치고 있었다. 따뜻하고 뿌듯했다.
“어떤 언어로 나 자신을 지어가고 있는가?”
언어가 만드는 집을 의도적으로 튼튼히 지으면 고통의 바람에도 끄떡없다.
완전하진 않아도 견딜 수는 있다.
힘들 때마다 그분의 “언어”를 떠올린다.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내 상처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진다면 그건 주치의 선생님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다.
2024년 10월 9일
원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음성지원되었다.
글이 노랫소리처럼 들려서 흥얼거렸다.
내 안에는 ‘나’가 여러 명 있다.
첫 번째는 세상이 보는 나.
환자이기도 하고 직장인이기도 하며 사회적 역할 속에서 살아가는 나.
그 자아는 늘 타협한다. 강한 척, 괜찮은 척, 버텨야만 하는 척. 마치 잘 닦인 유리창처럼 투명하지만 손을 대면 깨질 듯한 표면이다.
두 번째는 진짜 내가 느끼는 나.
감정과 욕구의 중심에 서서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욕망까지 모두 갖고 있다. 첫 번째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 그래서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고 싶은 날들이 있다.
세 번째는 관찰자이자 기록자인 나.
첫 번째와 두 번째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을 받아 적는다.
냉정하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 세 번째 자아 덕분에 대혼돈의 잔치 속에서도 나는 나를 잃지 않으려 한다. 마음의 풍경을 이해하고 무던히 노력하며 살아간다. 언어로 쌓은 집처럼 흔들릴지라도 버티게 하는 힘이다.
내 안의 여러 ‘나’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숨 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지키고 서로 다른 언어로 나를 다시 세우며 나를 잃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제, 악몽은 더 이상 내 잠을 점령하지 않았다.
1년 전 블로그에 흘려 써 내려갔던 일기들이 지금의 나를 잠시 흔들어도 그 끝에는 언제나 나 자신을 다독이는 위로가 있었다. 글에서 지나온 고통과 버텨낸 나 자신을 다시 만난다.
흔들림은 여전히 있지만 조금 더 나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의 가치는 더욱 또렷해진다. 작고 소소한 안도... 그것이 내 삶의 회광반조다. 회광반조는 화려한 조명이나 눈부신 태양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내 마음을 붙드는 작은 빛! 그 미세한 빛이다. 몸과 마음이 흔들리고 지쳐 쓰러질 듯할 때도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고 조금씩 살아갈 만해진다. 그 빛은 눈에 띄지 않아도 나를 매일 지켜준다.
모든 순간이 치료였다.
현대 의학의 현실은 냉정하다. 시간은 부족하고, 병상은 모자라며, 통증은 언제나 기준치 밖에서 흔들린다. 의사는 매일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며 효율과 인간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 같다.
의사도 아프고, 외로워 보인다. 완치라는 명분 뒤에 숨은 무력감, 결코 다 채울 수 없는 환자의 기대...
그 무게는 누구도 대신 지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길과 마음을 끝까지 남긴다.
완치를 향한 그 이면에는 늘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자리한다.
그 덕분에 나 같은 환자는 곁에 있음만으로도 치료가 된다.
2년 전, 주치의 선생님이 MRI를 찍어보자며 영상의학과에 의뢰하셨다. 예약이 밀렸는지, 대기가 길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급하게 신경과를 찾았다. 고통을 호소하자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정말 예민하시네요. 통증 역치가 낮아서 그래요.” 그게 전부였다. 내 통증이 감정으로 번역되는 기분이었다.
고통은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내 말을 증상 대신 성격으로 해석했다. 정말 황당했다.
“내가 예민한 걸까?” 스스로 곱씹어봤다. 지금 돌아보면 그 황당함은 당연했다.
통증은 몸과 마음이 함께 겪는 생리적, 심리적 경험인데 예민하다는 말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위로를 원한 게 아니었는데... 만약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검사상 큰 이상이 없어도 신경이 예민하면 통증이 실제보다 크게 느껴질 수 있어요. 몸이 긴장되고 피로해서 그런 거니까 통증 역치는 조절 가능합니다. 치료하면 좋아질 겁니다."
같은 사실이라도 "예민하다"대신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 "이건 조절 가능한 상태다’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말 한마디의 온도 차이가 치료의 온도 차이로 이어질텐데...
통증 역치가 낮다는 말은 인격적 평가가 아니고
몸의 신경계가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뜻임을 안다.
하지만 말의 질감, 표정이 차가워 그 병원에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주치의 선생님께 일러바치듯 말하자 속상했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통증 역치를 높여주면 되는 거죠? 수술 안 해도 됩니다. 어떻게든 고쳐드릴게요. 자연스럽게 함께 가 봐요.”
공감의 언어가 진통제가 되어 통증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자율신경 불균형과 염증 반응, 오래된 이력으로 인해 통증이 과도하게 증폭되는 사람이다. 신체적 손상이 크지 않아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그래서 예민하다는 말은 의학적으로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너의 고통은 실제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들렸다.
통증은 감각이지만 감정이기도 하다. 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아픈 거다.
그 누구도 이 통증의 결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니, 사람들은 괜찮다고, 이제 나았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건 표면일 뿐, 나는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그 누구도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전쟁을 보지 못한다.
말로 설명할 수도, 숫자로 증명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외롭다. 병보다 힘든 건 아무도 이 고통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저 하루를 버티며 내 몸의 언어를 다시 해석하려 애쓴다. 누군가 대신 이해해 주길 바라던 마음을 거두고 이제는 나 혼자라도 이 고통의 의미를 붙잡아보려 한다.
그 누구도 몰라도 괜찮다. 이건 내 이야기니까.
그동안 나는 너무 오래 달려왔고 몸보다 의지가 앞서 있었다. 아픔은 나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이제 그만 좀 쉬어도 돼.”
그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통증은 적이 아니었다. 내가 놓쳐버린 나 자신을 다시 데려오는 손짓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아픔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속에는 분명히 내가 있어왔다.
의사도, 약도 아닌 오직 나의 목소리인 내 몸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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