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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짐, 다시 시작

'만성통증'과 '불안'은 완치의 언어로는 닿을 수 없다

by 미리나


마음을 쉽게 씻어낼 수 없는 이유

저의 이야기는 통증을 잘 견디거나 이겨내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마음을 서툰 방식으로 다독이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제 내면의 기록입니다.


자율신경실조증과 만성 통증을 겪는 동안 공감 능력이 뛰어난 주치의 선생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완치’ 대신 ‘동행’과 ‘살아 있음의 기적’을 발견해 나갔습니다.


마음이 지저분할 때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다시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마음의 무게와 상처뿐 아니라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경험과 감정마저 함께 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을 너무 쉽게 씻어내는 것은 당장의 안도를 줄 수 있지만 나만의 이야기와 성장, 살아 있음의 흔적까지 지워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은 다시 찾아옵니다. 오늘 하루가 버겁더라도 살아 있음만으로도 회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통증은 나와 친해질 기회를 마음껏 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맞서야 할 대상은 통증이 아니었다. 통증은 단지 ‘계기’였고 문제의 본질은 내 안의 ‘불안’이었다. 결국 불안한 내가 원인이었다. 통증을 미워하던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오늘도 나는 아프지만 살아 있다.


기적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모든 게 완전히 나아지지 않아도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이니까.

오늘 하루를 버틴다. 오늘도, 그걸로 충분하다.



아무리 치료 목적이라고 한들 세상에 어떤 의사가 한가롭게 환자의 삶까지 들여다보려 하겠는가. 진료, 강의, 학회, 유튜브 촬영, 맨발 걷기 수업, 병원 이전 준비, 검진철...


기본 열 명 넘는 대기환자들 속에서 예약을 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했던 병원과 의사 선생님이 유독 바쁜 시기였다. 그런데 나는 편안하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원격치료.


죄송했다. 내 마음이 통제되지 않아서 고통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게 되는 날이면 일부러 자중하거나 보고를 미뤄도 원장님께 연락이 왔다. 그 연락이 나를 더 꼼꼼하게 만들었다.


매일 작은 불편과 감정을 기록하며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를 챙기는 일은 나 자신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 더 소중해졌다.




발열숙제라는 이름의 작은 보고서는 내 유일한 일과 중 하나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려 다섯 달 동안 꾸준히 작성해서 보내드리고 있었다.

매일 체온을 재고, 숫자를 적고, 상태를 덧붙였다.


“오늘은 좀 낫습니다.”
“두통이 여전합니다.”
“아직 열이 나요"

"너무 힘들어서 죽겠어요ㅠㅠ"

"이번 주는 무발열입니다"


가끔은 내가 주치의를 두 명 둔 건가 싶었다. 한 분은 병원에, 한 분은 메시지함 속에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날엔 신기하게 열이 조금 덜한 것 같았다. 해열제도 듣지 않아서 나한텐 그게 약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증상을 공유하려고 시작했지만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비밀 통신 같았다. 세상 누구도 모르는 어느 한 환자와 의사의 언어 교환.


늘 성의 있는 피드백이 돌아왔고 우리는 서로 할 말이 많았다.



불명열. 원인을 알 수 없는 열.


의학적으로는 특이한 사례였겠지만 내게는 그게 내 몸의 언어였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언어.


“오늘도 열이 납니다.” “그렇지만 견딜 만해요.”


그 말속엔 이런 뜻도 숨어 있었다.


“오늘도 고통스럽고 불안합니다. 그래도 살아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열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발열은 핑계였고 진짜 원인은 마음 쪽에 있었다.

발열이라는 겉모습 뒤에는 마음의 고통이 숨어 있었고 그걸 알아차리는 과정이 나에게는 ‘공부’이자 ‘숙제’였다.


숙제를 매일 확인해 주는 의사 선생님만 나의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답이 오면 일주일은 버틸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다 와갑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실 때면 고통의 발열보다 더 큰 불안을 달래주었다. 신체의 고통도 있지만 마음의 고통도 컸다.


믿음과 의심이 교차해 가끔은 ‘언제요’ 묻고 싶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정말로 끝이 오는지 회복이 가능한지 알고 싶었지만 그 질문조차 두려워서 꺼내지 못했다.

‘희망의 언어’를 붙잡고 버텼던 나의 마음은 잠시라도 기댈 곳이 있었다.



발열은 아홉 달이나 이어졌다.



증상의 특수성과 외로움이 커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준 의사 선생님께 더 깊이 의지했던 것 같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시절,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 속에서 단 한 사람에게 기대어 버티던 시절은 의사 선생님은 치료자이면서 세상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선이었다.

고마움, 의존, 그리고 미묘한 쓸쓸함이 함께 녹아내렸다.

그래서 그렇게 나를 도와주셨던 것 같고 나 역시 그렇게 의지했던 것 같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어쩌면 발열보다 고독을 치료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불안을 통제하려 했던 시절에서 스스로를 신뢰하게 된 회복의 변곡점까지 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건 불안의 또 다른 형태였다. 하지만 나만의 의식이 있었다. 매일 체온을 재고, 기록하고... 이제는 가끔만 체온계를 든다.


아직도 37도를 넘기면, 그때가 생각하지만 이제는 덜 무섭다. 통증이 와도, 불안이 와도 버틴다. 매일의 통증, 발열 상태를 기록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는 내가 나의 주치의니까.



다시 찾은 안도감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약 서른여덟 날 만에 다시 찾은 병원.


진료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던 나를, 원장님은 손짓으로 얼른 들어오라 하셨다. 늘 뵐 때마다 공감이 체질이신 것 같다.


"대구에는 언제 내려오셨어요? 서울에서 많이 힘드셨죠?"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겨주셨다.


지난주 화요일쯤 내려왔다고 말하니 벌써 치료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며 웃으셨다. 지난 시간들이 되감기듯 흘러가며 마음을 꽉 채웠다. 감사와 회상,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충만한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안도감과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고 확실한 것은 그 한 장면이 오늘의 나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는 것이다.


치료는 모래성처럼 겨우 쌓아 올리면 무너졌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그리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전에는 몸이 괜찮아지면 병원을 멀리했다.


병원은 마치 정기구독 같은 거라 꾸준히 내야 하는데 나는 꼭 중간에 구독을 끊는 타입이었다. 그러다 상태가 안 좋아지면 허겁지겁 다시 결제했다. 대부분은 자동결제가 아니라 수동갱신이었다.


회복이란 것은 꼭 닳은 충전선 같았다. 처음엔 잘 꽂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접촉 불량이 났다. 이리저리 꺾으며 버텼지만 불꽃이 튀었다. 불꽃이 튀면 병원에 가고 또 잠깐 충전되면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다짐했다. 다짐의 절반은 늘 지켜지지 않았다. 정작 다르지 않은 건 몸이 아니라 나였다.



나의 잔열을 읽는 초능력


몸이 낫는 건 금방인데 마음이 낫는 건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세상 모든 징벌이 나에게만 집중된 것 같았다. 신이 분명 나를 과대평가한 거였다. “얘는 이 정도는 버티겠지.”


그래도 나는 "왜 나만 이러지?" 같은 말은 거의 잘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너무 많이 들었으니까.


이런 말은 의사 선생님께도 이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늘 눈치채셨던 것같다. 그건 거의 초능력에 가까웠다. 치료는 몸을 고치는 일보다 마음이 얼마나 회복 가능한지를 묻는 일이란 걸 그때 알았다.


나는 늘 이번엔 다르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사실은 매번 다르게 넘어지며 배우는 중이다.



넘어질 때마다 통증은 새롭고
회복은 느리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있다.

불행이 습관이 될까 봐 불평조차 삼키며 살았다. 그렇게 1년을 버티며 배운 게 있다면 회복은 결심으로 되는 게 아니라 루틴의 미학으로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고 일기를 쓰는 일,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작은 습관들이다. 심지어 행복도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규칙적인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배우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낮에도, 밤에도 고통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사는 중이라기보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담담하게 적을 수 있지만 죽을 만큼 괴로웠고 죽지 못할 만큼 살아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병원 문 앞에 섰을 때 1년 전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어색하게 앉아 진료를 기다리던 내 모습, 주사 바늘 앞에서 움찔거리던 기억. 그 모든 장면이 고통과 희망이 뒤섞여 떠올랐다.


여전히 고단하지만 그때보단 한 뼘은 더 나아간 것만 같았다.


"익숙함이 때론 견딜만함인 거구나."


참 파란만장했던 1년이었다. 버텨낸 날과 무너졌던 밤, 그리고 다시 일어섰던 새벽의 시간들. 한동안은 흐릿하고 또 한동안은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 발로 돌아왔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 의지로.



원장님은 열이 날 때마다 궤도를 도는 별처럼 얼른 일어나 내 곁을 맴돌았다. 일정한 거리에서 내 상태를 읽고 계셨다. 꿈에 대한 질문도 연장선이었다. 병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나라는 사람의 잔열을 확인하려는 질문 같았다.


악몽 횟수가 줄었다고 답하자, "한 달에 한 번도 많은 거예요. 꿈속에서 나는 것(훨훨 나는 시도)은 하지 마세요." 누가 쫓아온다 해도 뛰어내리거나 도망가지 말고 스토리를 진행하지 않고 그냥 본다고 생각하라는 당부.


늘 기록 습관을 눈여겨봐 주시며 “오늘따라 평온해 보이시네요”라고 건네셨다.


아직 나는 엉망인데 쑥스러움과 안도감이 한데 섞여 머리카락을 꼬으며 한 손으로는 환자복 상의를 매만졌다. 칭찬과 관찰이 만들어낸 안전함 속에서 허락된 자신감과 평온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작은 변화가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기분이 좋아서 감사합니다! 하고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깜짝 놀랐다.


평소에도 어깨와 목 스트레칭을 하시는 걸 봤지만 이날은 목소리가 쉬어 있었고 팔에는 주사 밴드가 붙어 있었다. "원장님은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세요? 수액 맞으셔야겠어요!"^^


내가 조금 나아지니 이제야 1년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환자들을 돌보느라 고단한 의사의 몸짓, 병원 확장을 준비하며 분주했던 지난날들. 거의 내 집처럼 드나들던 병원의 장면들이 한꺼번에 포개져 떠올랐다. 의사 선생님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헤매는 환자인 나 자신에게 향한 연민. 그 둘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정말 낫자.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나아졌다고 멈추는 일 하지 말자. 다시는 스스로 외면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의 회복이 끝내 나를 구원할 수 있기를.






환자의 고통을 남 일처럼 여기지 못하는 마음.

수련할 때 선배로부터 핀잔을 들을 정도이셨다니.

그게 아직도 남아있다는 건 그게 본성이라는 뜻이겠지.


몇 달 전 만성통증, 암환우 단톡방에 원장님 건강에 대해 안부를 묻자 이렇게 답을 하셨다.



지구별 여행의 삶이 재밌다는 표현을 하실 때마다 함께 평화로워진다. 아픔도, 외로움도, 다 포함된 인생의 재미...


"아파도 괜찮다. 그게 나다."



완치 대신 동행


나는 평범하지 않은 환자였지만 그분은 현대의학의 한계를 넘어섰다. 증상 뒤의 마음까지 보려는 시선, 그것이 그분의 진료였다. 자율신경실조증은 완치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치료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견딤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함께 버티는 사람들이었다.


가끔은 주치의 선생님의 진심이 너무 뜨겁게 전해져서 버거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 덕분에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한계와 무력함을 알아본 사람들이었으니까.


내 치료는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공동의 인내와 이해로 쌓인 시간이었다. 완치에 집착할수록 나는 언어의 바깥에서 살아남는 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


아프지 않은 법 말고 아파도 살아가는 법을.

그래서 나는 완치 대신 "동행을 택했다. 몸과 마음, 통증까지도 내 편으로 두기로...




이제는 이 아픔도 나의 일부다. 좋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통증은 내 삶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살게 했다. 그 모순을 안고 나는 매일 조금씩 다시 태어난다.


오늘 하루를 견디고 내일의 빛을 맞이하는 것, 그게 내 스타일의 완치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뜨겁게 앓아본 적은 없었다.

몸은 불타듯 아팠고 열이 식으면 남은 건 힘없이 흩어진 살뿐이었지만 몸을 온도계 삼아 쉬지 않고 오르내리는 열을 재며 매번 새로운 고통의 형상을 배웠다.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눈물이 흐르는 밤이 연달아 찾아왔지만 삶을 놓아야겠다는 생각은 어쩐지 코웃음처럼 멀리서 비켜가고 있었다.


또 다음 날, 병원에 갔다.

“아이고, 오늘도 힘들어 보이시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 뒤로는 잠시 말없이 주의 깊게 바라보신다. 마치 과학자나 철학자처럼 눈앞의 증상만 보는 것이 아니고 “왜 이런 걸까?”를 끝까지 묻고 생각하는 분 같다.


주치의 선생님은 볼수록 좀 특별하다. 한 사람 전체를 바라봐 주시니 감사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의 의미를 반드시 찾아내려는 태도에 이제 덜 앓아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두통이 겹쳐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고 말했더니 의자를 내 쪽으로 얼른 돌리셨다. 한 손은 내 이마에, 다른 한 손은 내 어깨 위에 가만히 올렸다. 간호사 선생님께 체온을 재보라고 하시고는 꼭 직접 다시 확인하셨다.


병원에 와서 환복을 하고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선생님들은 늘 내 곁에 와서 혈압을 재라고 한다거나 체온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열 체크 좀 할게요. 오늘은 몇 도일 까요?” 매일 반복됐다.


가끔 “오늘은 괜찮아요, 집에서 재고 왔어요” 말하면,
“원장님이 재라고 하셨어요.” 그럼 나는 순순히 귀를 내줬다. 나이 든 분들이 의사 말 잘 듣는다던데, 나도 그랬다.



우리는 가족 같아요! 지나가며 과자를 넣어주던 선생님도 있었다. 오물오물 씹다가 이름 불러서 진료실에 들어가면 원장님은 “혼자 맛난 거 드시네요?” 그러면 나는 얼른 삼켰고 "식사도 못 하셨군요" 하시면서 기다려주셨다.


병원 식구들은 진짜 가족 같았다. 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은 정겨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는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이렇게 힘든 몸으로 어떻게 오셨어요?”그 한마디가 치료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목을 눌러보며 오늘의 치료 방침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실 때면 마음이 먼저 낫고 몸이 그 뒤를 따라왔다.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통증이 가라앉고 있었다.


좋아졌다 안 좋아졌다를 반복했는데 매일 수시로 물어보셨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아까는 얼마큼 힘들었어요?”
“몇 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까랑 비교했을 때 어떠세요?”

치료가 끝나고도 얼굴이 빨갛고 컨디션이 최악인 것 같은 날도 있었다.


“오늘 치료가 충분하지 않아 보여서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내 몸의 변화를 한 치의 놓침도 없이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통증 너머 마음까지 살펴주셨다. 진료가 아니었다.

고통의 언어를 함께 듣는 마음이었다.

증상만 관찰해도 감사한데 끝까지 함께 느끼고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더 절절하게 감사했다.



환자들의 고통이 전달되어 얼마나 벅차실까. 그럼에도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고, 환자에게 안도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셨을까.

그 마음은 진료 이상의 진심 어린 돌봄이었다. 나는 그 돌봄을 차고 넘치게 받았다. 그래서 용기를 더 내야 했다.



몇 달간 같은 증상으로 갔는데도 늘 빠짐없이 마치 처음 겪는 일처럼 새롭게 매일 질문하셨다. 내일 되면 괜찮아질 것을 아시면서도 늘 다른 양상을 포착하려는 그 마음은 망망대해에서 떠다니는 작은 빛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등대의 눈과 같았다.



내 몸과 통증의 작은 변화는 그분의 관찰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치료의 효과는 신속했고 근본적인 해소에 가까웠다. 만약 나를 보자마자 공장에서 찍어내듯 증상만 듣고 바로 주사 바늘을 꽂았다면 내 몸은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처방에 시큰둥하게 반응했을 테다.


속도만 중시하는 패스트푸드식처럼 근본 원인에는 눈 감고 고통의 문고리만 잡고 서성였을 것이다. 숙고와 공감이라는 두툼하고 정성스러운 조리 과정이 있었기에 치료는 제대로 된 방아쇠가 되어 완전한 치유를 명중시켰던 것이다.



금이 간 도자기와 불안이라는 동력


의학적 처방 이상으로 진심으로 환자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 고맙고 감사했다. 그 고마움이 한편으론 괜스레 자주 부끄럽기도 했다. 의사의 진심 앞에서 내 나약함이 들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이 나를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도록 떠밀고 있었다. 나는 초민감자에 초불안녀였으니 내 신경계는 공포와 긴장에 매우 민감했고 긴장된 몸은 통증을 더 크게 느끼게 했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몸이 나아지면 마음도 함께 회복될 거라 믿는 건 착각이었다.


그것은 금 간 도자기를 반짝이는 광택제로 닦아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갈라져 있었다. 감정은 꾹꾹 눌러 담겨 폭발 직전의 가스처럼 부풀었다. 불안은 작은 발전기처럼 윙! 하고 시끄럽지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어떤 날은 심하게 발효된 김치통처럼 부풀어 있지만 썩지 않으려는 삶의 발효가 들어있었다. 어설프게 붙잡을 때는 나를 괴롭히지만 가만히 바라볼 때는 나를 일으켜주었다.


세탁기 안에서 돌고 뒤집히는 옷감들을 보면 꼭 나 같았다. 휘말리고 치이고 거품 속에서 엉망이 되면서도 깨끗해졌다.


이제는 불안을 뜨거운 머그잔처럼 감싼다. 입술이 데이지 않을 만큼, 온기가 사라지지 않을 만큼 꼭 쥔다.


쓴 커피처럼 속을 쓰리게 하지만 잔을 놓지 않는다. 쓴맛도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맛이니까.


불안은 오래된 집 복도 끝 구석의 수도관 누수처럼 눈에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나를 확인하게 하는 살아있는 언어였다.


나의 욕구, 두려움, 경계심, 상처를 발견하게 하고,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해하게 해 주었으니. 의사 선생님은 그 미묘한 수압을 알아차리듯 나의 불안을 정확히 건드려주었다.




고통 위에 삶을 내려놓고 앉으라는 위로


나의 증상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으니 그것을 문제라고 불렀다. 정말 발열과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는 그걸로 만족할까? 아닐 것이다. 통증이 사라져도 나는 평생을 갈급해할 것이다.


통증이 어느 정도 있을 때 몸을 느낀다.
나를 돌보고 살아 있음을 절실히 자각한다.

한때는 아무 감각 없는 평온이 좋을 줄 알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프지 않다는 안도 뒤에는 찝찝하다.


“그래서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통증이 사라지는 날엔 고통은 없지만 공허가 찾아왔다.
내가 진짜 바랐던 건 고통의 부재가 아니었다. 고통을 견디며 얻게 되는 살아 있다는 감촉, 삶의 재질(?)이었다.


그렇다면 완전히 낫는다는 건 무엇일까.


통증이 사라진다면 나는 이제 무엇으로 나를 느끼고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그 갈급함이 무섭지 않다. 무언가를 더 느끼고, 더 알고, 더 살아보려는 욕망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불안이 안 좋은 감정이라고 꽤 오랫동안 믿었다. 통제력을 잃은 것 같았고, 약한 티였으니까.


처음 의사 선생님이 내 불안을 알아차리셨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불안해요. 괜찮아요." 전형적인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의사 선생님이 나의 불안을 스쳐 지나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뭔가 이야기하지 않은 게 보인다”라고 말씀하시며 불안은 안 좋은 감정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게 치료의 출발점이었다. 한때는 피하고, 감추고, 삭제하려 했던 그 감정이 나를 구석에서 꺼내 밖으로 나오게 한 첫 단서였다.



고통은 나를 시험하지만, 불안은 나를 드러낸다.


행복은 고통을 통해 증명됐고, 고통은 행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어도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떴다. 커피를 내리고, 창문을 열고, 식탁 위에 전날 먹다 남은 빵도 먹었다. 그 소소한 반복을 하고도 삶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도망치지 않아도 돼요. 불안이 없으면 우린 다 죽습니다. 지금 그 불안은 당연해요. 어느 날 원장님이 지나가듯 이야기하셨던 이 말은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오지 않더라도 불안 위에 삶을 내려놓고 앉으라는 위로로 들렸다.

불안이라는 감정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경계는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내 생에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특별하고 행복했던 병원 생활이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한 환자임에 틀림없다.



자율신경실조는 언어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 통증, 불안, 긴장, 이완... 모두가 말을 걸어오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혼란스럽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김정훈 의사 선생님은 통증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내가 내 몸과 마음의 언어를 다시 읽고 회복의 말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덕분에 나는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고 나를 살리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정말 잘 살아내고 싶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늘 성실하고 단단하게 빛나는 인생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커질수록 숨이 자주 막혔다. 잘 살아내고 싶을수록,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상처나 좌절은 원래 흘러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 그 흐름이 멈췄다. 흘러가지 못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결국 그만 없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망했다기보다 넘쳐버린 마음이 갈 곳을 잃은 결과였다.

이제 돌아보면 그건 정말 죽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라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른 모양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얼마 전 의사 선생님 앞에서 며칠 잠도 못 잤다며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의 치료가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파도가 잦아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일렁이는 것처럼 치유가 더 깊이 들어가면서 생긴 흔들림이었으리라.

밥을 양껏 먹는다고 내일까지 배부르지 않듯이 지금 고통이 크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 이것도 못 참느냐고 말할까 봐 겁이 났다. 사실 내가 나를 더 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같지만 ‘내가 왜 이 정도도 못 버티지?’ 하는 내 판단이 더 아팠다. 진짜 두려운 건 남의 말이 아니라 내 마음의 비판자였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뜻밖의 말을 하셨다.
“미리나님 통증은 각오할 준비가 되었어요.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아하, 통증은 평생 갈 수도 있는 거구나."


내 고통의 영속성을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 투쟁을 공존이 될 수 있다니 이겨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날 이후, 빨리 나아야 한다, 이겨내자는 강박에서 다시 한번 자유로워졌다.

누군가 내 고통을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부분으로 인정해 주는 건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였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병원을 다니는 게 지겹지 않으냐고.


어떤 의료진들이 함께 하느냐에 따라 회복은 달라진다.


집은 내가 회복하는 곳.
병원은 내가 회복을 배우는 곳.
몸이 병으로부터 다시 나 자신에게 귀향하는 일.

항상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졌는데 병원에 오면 완전히 속도가 늦춰졌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 선생님이 천천히 쉽게 설명해 주셔서 좋았다.



2024년 9월, 자율신경이 좋아졌을 때 찍은 영상이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뛸뜻이 기뻤다.ㅎㅎ

집에 오는 길, 내 머릿속은 온통 꽃밭이었다.



자율신경실조증은 신경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다.
교감과 부교감이 엇갈리며 몸 안에서 나는 낯선 사람이 된다. 이 병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질환은 완치보다는 조절과 회복이다.
신경의 조절 능력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감기처럼 “병원균”이 사라진다고 해결되는 질환이 아니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고 스트레스, 호르몬, 체질, 수면, 약물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계이므로 ‘원인 제거 후 끝!’ 하는 완치 개념이 없다.

다행히 신경은 가소성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완치가 어렵다는 말은 “다시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지 “평생 괴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조절 가능한 만성 기능성 질환이므로 회복이 가능하고 삶의 질도 충분히 되찾을 수 있다.


나는 이제 거의 증상이 없고 몸이 나를 다시 믿어주는 단계까지 온 것 같다.


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하며, 아프기 전의 나는 다시없지만 그 자리에 다른 내가 자란다.






에필로그

그동안 이 복잡하고 끝없는 고통과 회복의 여정을 함께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제겐 비단처럼 닿았습니다. ♡


세상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고 계신 분들께 꼭 전하고 싶어요. 제 인생만 유난히 꼬였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는데 길은 있었습니다. 그 길은 멀리 있지 않았고, 아주 천천히 찾아왔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조금 늦을 뿐, 도착하지 않는 길은 없습니다.


이상, 지구에서 아직 행복한 의사와 나 2화 연재를 마칩니다.


긴 여정이었죠. 읽는 동안 피로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고통의 날들이 많았답니다. ㅎㅎ


하지만 이제 조금 달라요.
3부를 살짝 스포 하자면 회복의 끝에 빛이 보입니다.
한때 불안이 제 열이었듯, 이제는 감사가 제 체온이 되었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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