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의 서한에서 김중업을 느끼다
‘형은 참 잘되었소. 내가 가장 존경하는 형이 파리에 가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기쁘고 마음이 든든하오. 또한 평소에 우리들이 존경하던 코르뷔지에…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1]
김환기 화백이 남긴 저서 속 문구는 세계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를 김환기가 얼마나 공경하는지 알 수 있는 대표 구절입니다. 김중업은 1922년 평양시 진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중업은 공부에도 두각을 드러냈지만 특히 미술이나 시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중업은 당시 사회의 분위기와 집안의 분위기를 거스를 수 없어서 타협점으로 건축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김중업은 서울공대 전임 조교수, 한양공대 전임교수, 이화여대 시간강사 등 강의를 진행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높여갔습니다. 그의 인생에 역사적 반환점은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일 것입니다. 그는 특별연사의 특징을 가지고 입회했으나 연회 석상에서 만난 르꼬르뷔제에게 파리로 초대를 받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파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3년 6개월간의 유학 생활. 김중업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2]
15년간 자신의 이념을 건축에 담아냈던 김중업은 와우아파트 붕괴, 당시 경기도 광주의 도시 설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누명으로 1971년 강제 출국 당했습니다. 김중업의 아버지 김영필은 일제강점기 당시 군수를 지냈지만 끝내 창시 개명을 거절했다고 하니 아버지의 강직함을 김중업이 닮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3]
강제 출국을 당한 후 김중업은 프랑스의 페르 앙 타르드누아(Fère-en-Tardenois)라는 시골로 향했습니다. 망명자의 신분인 김중업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당시 유엔 본부에서 건축위원으로 일을 했기에 자신의 제자를 위해 난민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결국 김중업은 1988년 프랑스에서 삶을 마감한 순간까지 난민의 신분이었다고 합니다.[4]
국내에서는 추방당한 인물로 남았지만 김중업의 작품은 한국 전통의 가옥들에서 미를 착안하여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김중업의 건축에서 기둥은 답답한 느낌에서 벗어나 하늘의 빛을 땅으로 내려주는 역할을 하며 지붕은 아래를 덮는 느낌이 아니라 올라가는 지붕 선에 의해, 하늘과의 만남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5] 그의 작품 세계는 단순히 거주하거나 사무의 업무를 보는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건축물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올림픽공원 건물, 홍익대학교, 주한 프랑스 대사관 등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본 적이 있는 건축물을 1세대 김중업 건축가가 제작했습니다.
서양의 자재를 사용하면서도 한국의 얼을 놓치지 않았던 김중업. 그의 삶을 돌아보며 청명한 하늘 속 그가 남긴 건축들을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1]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재단, 2021), 41.
[2] 조인철, 「건축사」, 『한국의 건축가-김중업』, 86.
[3] 위와 같음, 82.
[4] 위와 같음, 87.
[5] , 「건축사」, 『꿈과 시와 낭만의 건축』, 1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