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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Jan 28. 2024

마케터 양반, 지금 장난하시오

D-95 신제품 없는 신제품 OT

‘신제품 오리엔테이션 참석 요청’ 메일이 오고야 말았다. 제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시작되며, 출시 때까지 총력을 다하자 결의를 다지러 오라고 한다. OT는 제품 런칭의 신호탄이다. 또 시작이구나, 3개월은 꼼짝없이 매이겠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다. 


런칭 TF 명단에 버젓이 이름이 올라가 있으므로 피할 도리가 없다. TF실에 불려 가 출시 때까지 감금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런칭은 호환마마보다 무섭고 마음이 졸아 불기 시작하며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백일 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뻔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달갑지가 않다. 




어떤 녀석이 나오길래 호들갑인지 상견례에 가 본다. 조그만 회의실로 부를 때 예상했듯 신제품 OT에 신제품이 없다. 녀석의 신상 명세를 줄줄이 써 놓은 PPT와 그걸 읊어 주는 마케터만 덜렁 있다. 제품이 없어도 얼마나 대단하고 새로운 지 머리에 그려지도록 소상하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알려줘야 할 텐데 PPT 절반은 업데이트 예정이다. 궁금한 것은 녀석인데 마케터는 얼마나 어디에서 팔지에만 심혈을 기울여 설명한다. 잘, 많이 파는 게 중요하지만 그러려면 녀석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어야 제대로 포장해 내놓아야 할 거 아니오, 마케터 양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 꼴인가. 제품을 글로 배워서 이걸 영업사원과 고객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직접 보고 쓰고 느껴도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는데 불친절한 설명서만 보고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좋은 말만 가득한 소설을 한 바닥 써내야 할 걸 생각하면 뒷골이 땡긴다. 런칭은 맨 앞 사람이 카드를 보고 옆 사람에게 귓속말로 설명하면 마지막으로 전달받은 사람이 정답을 말하는 게임과 비슷하다. 저 마케터가 맨 앞사람일 텐데, 소비자가 오답을 외치면서 득점에 실패하고 폭소로 끝나지 않아야 할 텐데. 심히 걱정되는 시작이다. 

  

가끔 성의가 넘치는 오리엔테이션도 있다. 대표 이사 이름으로 초대 메일을 보내고, 본문에 귀하께서 꼭 참석하여 주시기를 바란다는 간곡함이 담겨 있다. 대회의실에서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 제품과 관계된 주요 담당자들이 부문별로 상세히 설명하고 질의 응답도 진행한다. 직접 제품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슨트 투어처럼 기능별 체험을 위해 랩실을 방문하여 충분히 보고 듣고 만져 볼 수 있다. 제품이 시원찮아도 다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에 나도 일조해야겠구나 열정의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하고, 제품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되니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도 쉽다. 이렇게 제대로 된 OT는 간헐적이고 대부분은 전자처럼 업무가 시작된다.   

OT가 끝나고 참석자들의 얼굴이 밝지 않다. 작년 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고 약간의 기술과 컬러, 스펙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제품이 크게 달라지거나 좋아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신제품이 나온 것처럼 런칭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막막하다. 신제품의 신(新)은 새로울 신이다. 기존 제품과 전혀 달라야 한다. 완전히 다르지 않다면 신제품이 아니라 파생 제품이나 유사 제품이라고 해야 한다. 해가 바뀌어서 새로 내놓는다고 신제품은 아니며 고객들에게 새롭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월급쟁이는 별 수 없이 그 노릇을 할 궁리를 찾는다.  


제품은 비슷한데 세상에는 다르게 보이도록 해야 하다니 런칭은 마술사가 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제품이 시원찮아도 포장(마케팅)이 좋으면 어느 정도 먹고 들어가긴 한다. 하지만 과대 포장은 금방 들통나기 마련이고 제품에 근거해서 유기적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포장이어야 비로소 팔린다. OT로 스타트 라인에서 탕하는 신호가 올린 것처럼 출발해 본다. 앞으로 가라니까 달리기는 해야겠는데 어디까지 어떤 자세로 얼마나 빨리 뛰어야 할지 모르겠다. 




피니쉬를 어떻게 통과할지 협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하라면 해’라고 하니까 뛰어 보지만 잘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뒤를 돌아보고 옆 사람을 흘깃거리게 된다. 매년 하는 맨 땅의 헤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동화 속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와 같은 결말로 끝날 것이다. 끝날 때까지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매 순간 생각하면서 한숨을 섞어 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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