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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Feb 02. 2024

인풋이 없어도, 아웃풋은 좋아야지

D-49 살 떨리는 1차 리뷰


"교육 문서 초안은 언제 주실 건가요?"

"자료와 이미지는 언제 주실 건데요?"


창과 방패처럼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진다. 상대는 네가 만든 문서를 주면, 관련 자료를 챙기겠다고 한다. 나는 백데이터를 받아야 완성도 있는 초안을 만들 수 있다 맞섰다. 서로 네 패를 보여 줘야, 나도 보여 주겠노라 으름장을 놓으며 패 숨기기에 바쁘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처럼 우애 좋게 일하면 좋겠지만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처럼 일의 순서를 따지고 미루기 바쁘다.


잘 지내던 파트너라도 런칭 면 날을 세우고 으르렁거리게 된다. 업무가 얽히고설키고 있고 누가 먼저 업무에 수고를 더해 준다면 상대는 수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완전하게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면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기 때문에 눈치 게임에 기싸움까지 벌이게 된다.


상식적으로 백데이터가 준비된 다음, 콘텐츠 작성을 하는 게 맞기에 할 말은 고 넘쳤고 기세는 당당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에 엄연한 갑을이 존재하고 권력이 핵심이고, 우기고 강요하는 데 장사 없다. 거기에 하늘이 두 쪽 나도 바꿀 수 없다는 출시일도 한몫한다. 첫 번째 주자가 한 바퀴 돌고 배턴을 넘기면 다음 주자가 출발해서 이어 달리기가 순조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누가 턴을 들었는지, 넘겼는 지도 모른 채 다 같이 뛰다 힘들면 쉬었다 누가 툭 면 기계적으로 달려야 한다. 모든 것이 동시 다발로 앞뒤 없이 이루어지는 대환장 파티가 열린다.


인풋은 거의 없거나 부실해도 아웃풋은 제대로 나와야 한다는 논리로 초안에 대한 푸시가 들어온다. 초라한 문서를 보여주기 싫은 건 백그라운드와 무관하게 온전 내용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부실한 백데이터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럽던 사람도 결과물을 볼 때면 깐깐한 심사위원처럼 실눈을 뜨고 문제점을 짚어내니까. 개떡 같은 자료를 주어도 결과물은 찰떡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풋이 풍성할수록 아웃풋도 좋아지며, 빈약한 인풋에 부실한 결과물이 따라 오지만 아무도 감안하지 않는다. 한 결과물의 사유로 자료가 없어서요나 데이터를 못 받아서라고 했다가는 비겁한 변명을 하는 저가 되는 비정한 세상.


런칭 날짜, 자료 배포일은 정해져 있으니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임박한 데드라인은 스트스지만, 속도 내는 데 이보다 좋은 없다. 시간이 많을 때는 `그분'을 암만 기다려도 오질 않아 업무가 제자리이다. 마감을 앞두면 업무 진도를 줄 나가게 해 주실 `그분`이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파트너와 신경전도 업무 추진력을 더한다. 두고 봐라 거지 같은 자에도 당신의 도움 없이도 잘 해내겠다는 오기가 발동된다. 어떻게든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큰 소리 리라. 흥칫뿡!


기세 좋게 디데이 전 날 리뷰선포했다. 정해진 날은 내일이지만 특별히 선심 써서 미리 보여 주겠다며. 날짜를 여유 있게 잡아 놓고 당겨서 공유하면 반은 먹고 들어 간다. 준비성 있게 열심히 한 인상을 주고, 시간을 벌어 파트너도 여유를 갖고 안심할 수 있다. 환심을 사거나 생색 낼 의도는 아니었고, 업무 하나라도 줄이려고 전날 오후 회의에 리뷰를 엎어 버렸다. 하루라도 매를 빨리 맞는 게 나으니까. 떠밀려 끌려 가느니 내 발로 단두대에 오르는 게 속 편하니까. 초안을 붙잡고 끙끙대는 것보다는 빨리 공론화해서 뒤집거나 엎거나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게 나으니까.


보고는 타이밍과 순서의 기술이다. 하루 일찍 회의를 당겨서 50 점을 얻은 데다, 앞에 다른 회의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추가 50점을 획득했다. 한 시간을 넘기자 참석자들은 이미 진이 빠졌고 혼이 나가 있었다. 앞에서 에너지를 소진해서 이렇다 할 반대 의견이나 과한 피드백이 나오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게 만장일치, 만사 오케이의 매직이 일어났다. 이런 걸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해야 할지,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웃프다. 수정하고 추가할 것들이 생겼지만 적어도 초안이 뒤집히거나 엎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설계도부터 그리지 않아도 된다니, 오늘의 수확은 꽤 괜찮다. 운이 억세게 없으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때도 있다. 맨 땅에 헤딩도 두 번은 잔혹하다. 주춧돌과 기둥까지 잘 세움 셈이니 살을 붙이고 예쁘게 단장해 봐야겠다.


사실 파트너와 나는 서로의 패를 노리는 사이가 아니다. 런칭이란 한 배를 타고 있고 모든 패를 공유해서 잭팟을 터트려도 모자랄 사이다. 다만 결과물을 요청할 때는 백그라운드에 대해 충실히 작은 것 하나라도 서포트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라면 해'는 곤란하다. 업무 과정과 결과에 대한 원만한 협의가 필요하며, 요청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충분한 설명과 양해가 필요하다.


자, 이제 나의 패는 다 보셨으니, 당신의 패를 보여 주시기를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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