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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흰돌 Nov 17. 2023

아들 둘이라고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시 봐주시겠어요

아들 쌍둥이란 소식에 기뻐하는 아빠에게 버럭 화를 냈다



  임신 초기의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한때 '인공수정 3일째', '인공수정 5일째'를 검색했던 나는 이제 '임신 8주 3일', '임신 13주 1일'과 같은 검색어를 넣어 찾아보는 게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백 일을 꼽자면 나는 주저 없이 쌍둥이 신생아 시절, 아이들의 탄생부터 백일까지의 시간을 고르는데, 그다음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렀던 것이 임신 초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거꾸로 매달려있어도 시간은 간다고. 마침내 16주, 쌍둥이들의 성별을 확인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첫 포스팅에도 썼지만, 내게는 내가 딸을 낳을 거라고 장담하던 친구가 있었기에 나는 무의식 중에 두 아이 중 하나는 딸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딸 쌍둥이일까? 아니면 남매 쌍둥이?
소망이 심박수가 언제나 더 빠른 걸 보면 소망이가 딸이고 희망이가 아들일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본 정보까지 더해 혼자만의 회로를 팽팽 돌렸으나, 성별 결과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래 있는 아기부터 볼게요. 다리를 잘 벌리고 있네요. 아들이에요.
그럼 위에 아기는… 얘도 잘 보이네요. 아들입니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들 둘이라고요? 선생님, 다시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뭔가 잘 안 보였다거나… 네? 바뀔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 아가들은 둘 다 쩍벌자세로 뱃속을 유랑하고 있었기에, 초음파를 잘 볼 줄 모르는 내 눈에도 다리 사이에 달린 그것은 선명하게 보이기만 했다.


  아들 둘이라니?


  쌍둥이에 이은 두 번째 충격이었다.


  원래 내 꿈은 얌전한 딸아이를 하나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쌍둥이에, 그것도 아들 둘 맘이 된다니?


  얼떨떨한 정신으로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진료를 보러 간다는 소식을 미리 전했기에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신 모양이었다.


  입덧이 심하지만, 뱃속 아기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단 소식을 전하자 아빠는 무척 기뻐하셨다. 그리고 이번 진료에서 나온다는 쌍둥이 성별을 궁금해하셨다.


  둘 다 아들이래요. 아들 쌍둥이.


  퉁명스러운 어조를 눈치채지 못한 아빠는 크게 소리치듯 좋아하셨다.


  잘 됐구나! 잘 됐어! 축하한다! 흰돌아!


  그 말 한마디에 오갈 데 모르고 미지근하게 고여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잘 되긴 뭐가 잘 돼요! 전 아들 말고 딸이 좋다고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아들이 좋은 건 아빠뿐이겠죠! 전 아들 둘이라서 속상하다고요! 아빠는 왜 그렇게 사람 마음을 못 알아줘요?


  난데없이 화를 뒤집어쓴 아빠는 놀라서 전화를 끊었고 나는 억울함이 치밀어올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난임 기간을 거치며 쌓여왔던 자격지심이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그날은 왜 그리도 서럽던지.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느낌이, 더 나아가 세상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끔찍이도 슬펐다.


  아빠의 축하 인사에 별 뜻이 없다는 건 머리로는 잘 알았다. 우리 언니는 아들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가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아빠 입장에서는 손녀들만 있는 와중에 손자가 생긴다고 하니 좋으셨을 테다.


  그러나 아빠에게 손자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는 딸이 필요했다.



(c)2023. delight.H(https://www.instagram.com/delight.hee/). All rights reserved.




  나 이상으로 딸을 바랐던 남편은 지금도 한 번씩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셋째가 딸이라는 보장만 있으면 무조건 낳는 건데.


  이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셋째도 아들이야.


  딸을 그토록 갖고 싶었지만 결국은 아들만 둘 키우신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남편 역시 딸을 갖고 싶었으나 아들만 둘 키우게 되었다. 이런 걸 보면 성별을 결정하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의 유전자가 맞다는 생각도 드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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