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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은 소설가 Feb 26. 2024

[기억이 사라질 날을 기다리며-1화]

단편소설

<기억이 사라질 날을 기다리며>는 <벚꽃 신호등>으로 수정하여 연재합니다.


*     


    마지막 나뭇잎이 떨어져 나가며 몸을 부르르 떤다. 어떡해서든 잡아두려던 욕심은 작은 바람조차 남지 않았다. 하염없이 바람에 몸을 싣고 탱고 춤을 추며 날아가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언제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있었냐며 바람을 탄다. 짐 보따리를 싸매고 출가하는 자식처럼 내가 갈 길은 여기라며. 나뭇가지에 드러난 작은 속살만이 나무와 나뭇잎을 이어주던 연결고리였다고 앙상한 가지들이 서로 어루만진다. 나무는 마른 눈물로 혼자 애달파 한다. 지난 110여 년 동안 자라며 겨울이 다가오기 전 떠나가 버린 무수히 많은 나뭇잎을 잊었다. 봄이 오면 언제 또 떠나가 버릴지 모르는 새싹을 피워내며 열매 맺을 낮만을 손꼽아 기다릴 거다. 하루만 지나도 어제 일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다. 매해 찾아오던 겨울 까마귀 떼도 처음 만난 듯 인사한다. 처음 만난 사이처럼 반갑게 인사한다. 어디서 왔냐고, 내일은 또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기억하지 못할 걸 알지 못하고 매일 찾아오는 새에게 똑같이 묻는다.


    가지만 남겨진 마을 앞 벚나무는 일제강점기 시절 어느 인부에 의해 심어진 작은 어린나무였다. 벚꽃 길을 만들자며 마을 입구는 아기 묘목으로 심어졌다. 수백 그루의 나무는 어디서 왔는지도 잊고 이곳에 놓였다. 며칠 전만 해도 친구들과 가까이 붙어 서서 끝없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보냈던 시간과 과거가 됐다. 도시 설계자는 수십 명의 인부를 모집했고 일꾼은 엽전 몇 닢 받아 가며 매일 실어 오는 묘목을 심었다. 그렇게 하루 처자식 굶기지 않으려 하루치 노동력을 팔았다. 덕진이의 할아버지는 그 인부 중 한 명이었다. 너무 어릴 적 돌아가셔서 사진 속으로만 보던 할아버지 모습이다. 아버지 지갑 안쪽에 꽂아 둔 사진은 하루에 한 번씩 꺼내어 늘어놓는 바람에 모서리가 해져있다. 큰아버지인지 본인인지도 헛갈릴 만큼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은 아버지의 보물 1호다. 당신 아버지가 심은 벚나무가 마을 입구까지 길게 늘어져 사월이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말씀하신다. 그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벚꽃은 봄을 알리는 신호등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신호등에 분홍색 불이 들어온다. 꽃봉오리가 생기면 얼었던 산골짜기 물줄기가 녹아 마을을 휘감으며 개울가를 흐른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들도 목청 높여 울기 시작한다. 일찍 깨어난 개구리가 어느새 낳은 알들은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와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개구리는 알들을 붙잡아 둔 바위에 감사하며 또 운다. 그렇게 봄이 깨어나는 걸 준비하며 벚꽃이 건네는 신호를 따른다. 그 무렵이 되면 서울에서 연천에서 속초에서 각지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든다. 따뜻한 대리마을로 찾아온다. 십 리에 달하는 벚꽃길은 더 이상 마을 주민들만 누리는 생활터가 아니다. 몇 해 전 다녀간 여행잡지 기자가 올린 소개 글로 전국 관광명사에 등재되다 보니 철만 되면 인산인해가 된다. 그러다 보니 올해도 관광객들이 찾기 전 읍사무소는 도로 정비에 나서고 허가받은 판매상들은 자리 선접에 나섰다. 관광상품이라지만 지역 상품이 아니다 보니 불 들어오는 풍선에 머리띠에 모자에 스마트폰 고리에 장식구에 전부 동네 사람은 관심이 없는 상품뿐이다. 마을 앞 벚꽃 나무 주변은 살포지 올라온 햇빛을 따라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덕진이는 벚나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다. 올해도 찾아오는 꽃봉오리를 쳐다보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아침 녘 건빵 봉지 하나와 보온 통에 담긴 데운 물, 커피믹스, 종이컵을 챙겨서 나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마을 앞까지 다시 나왔다. 어젯밤 걸려 온 전화로 잠 한숨 다 마치지 못하고 집을 나서서 왔던 탓에 하품이 몰아친다. 작은 수레를 밀며 지나가는 커피 판매 상인한테 산 아메리카노는 손에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마시기에는 너무 뜨거워 입 한번 다가가지 못하고 손으로만 소중히 감싸 쥔다. 후후 불어 호로록 마신 한 모금은 회사에 있던 카페테리아 커피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무슨 원두를 쓰시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가판대 위를 끔뻑거리며 몇 번을 훑어봐도 커피 원두는 보이지 않아 궁금증을 입 안에서 도로 삼켰다. 커피는 원두가 좋아야 한다며 유명 커피 가게만 찾아다녔던 덕진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두 번째도 콜롬비아산 원두로 내린다는 회사 커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호기심도 아니고 신기함도 아니고 의아함도 아니고 황당함도 아닌 물음에 답을 얻지 못했다. 그저 다시 벚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는다. 해가 떠오르고 날이 밝으며 마을 안으로 온기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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