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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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을 바라보던 덕진은 문득 파출소 전화를 돌이켰다.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시더라도 작은 안심을 할 수 있는 인식표가 있었다. 목에 걸린 목걸이는 없지만 누구든 길 잃고 방황하는 노인을 보고 파출소에 전화 한 통만 해주면 몇 분 안에 보호자에게 연락이 온다. 보호자는 덕진이 자신이란 걸 알고 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볼륨을 최대로 올려놨다. 혹시라도 파출소에서 오는 전화를 놓칠지 싶어 회사에서도 잠잘 때도 지하철에서도 진동과 소리를 모두 켜놓고 생활한다. 전화벨 소리에 예민해졌다. 광고 전화든 설문조사든 모르는 번호든 두 번 울리기 전에 전화기를 꺼내어 받는다. 전화기가 아버지 같다. 혹시라도 놓치면 아버지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거 같다. 죄송해진다. 전화기 화면을 한 시간에 한 번씩 확인하는 걸 아버지 안부 묻는 거로 생각한다. 대리마을에 사는 아버지는 알지 못한다. 덕진이가 보살피는 게 핸드폰인지 본인인지.
벚꽃 나뭇가지에 피어나는 꽃봉오리가 보인다. 나란히 붙어 서로 의지라도 하는 양 살갑게 지낸다. 고만고만 새끼손톱만 한 크기에 누나고 동생이고 가릴 거 없이 모두 쌍둥이 같다. 포근한 햇살이 마을 안 깊이 들어와 자리를 펴니 꽃봉오리가 신이나 쑥쑥 자란다. 어린아이 젖 먹이듯 벚나무도 뿌리 깊은 땅속에서 영양분을 흡수한다. 올해는 태어난 꽃봉오리가 작년보다 더 풍성하다. 며칠 내리지 않은 봄비를 기다리며 땅속 안쪽으로 뿌리를 더 내린다. 하얗고 여린 살 뻗어 낸다. 딸린 식구들을 먹여야 하는 부모 마음이다. 아홉 남매인 덕진이 아버지 형제도 어릴 적 배고프다고 얼마나 성화를 부렸을까. 나무 혼자 키우는 벚꽃은 부모 마음도 모르고 밥 달라고 칭얼거린다. 마을 길목에 늘어선 상점들 사이로 나무 그늘이 덮어졌지만, 벚꽃 신호등이 켜지지 않아 듬성듬성 햇살이 굵게 파고든다. 두툼한 허리춤에 나무는 본인 나이도 잊고 봄이 오면 꽃봉오리 기르기 바쁘다.
꽃봉오리를 바라보던 덕진이는 아들과 딸이 다 자라서 시집, 장가가고 나서 본인 기억이 사라지길 바란다.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곧 다가올 걸 알고 있다. 그놈의 유전자가 뭔지. 메모장 수첩에 작은 기록을 적기 시작했다.
11월 8일. 첫째 유치원 체육대회. 아들과 함께하는 장애물 달리기에서 2등을 했다. 선물로 받은 장난감에 아들이 좋아한다.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걸어오며 또 한 번 아들과 달리기 시합을 했다.
11월 13일. 대전 출장을 다녀오며 호두과자를 사 왔다. 아들과 딸이 호두과자 포장지를 다 벗겨놓고 구슬치기하고 있다. 밟아서 으깨진 호두과자는 모두 내가 먹었다.
기억은 하루가 지나면 일반사람도 절반 이상이 지워진다. 슬프고 속상한 일들을 빨리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기억이 채워져야 할 공간이 필요하다. 어떤 날은 더 빠르게 지우고 싶다. 상사에게 한 소리 들은 날은 전부를 삭제하고 싶다. 없었던 거처럼 만들고 싶다. 사람의 기억도 지우기와 새로고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덕진은 하나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일상을 기록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본인이 잊지 않고 싶은 추억을 머릿속에 간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록하다 보니 평범한 이야기다. 소소한 가족, 회사, 음식, 여행, 친구 이야기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때론 적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질 거라는 기억은 신기할 만큼 지워지지 않는다.
- 할아버지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떡해? 어느 날인가 아들이 물었다.
- 새로운 기억을 선물해서 드리면 돼. 오래 신던 운동화를 버리고 새 신발을 신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 한 모금은 쓰디쓴 커피 본연의 맛을 느끼게 했다. 차가워졌지만 썼다. 커피잔을 타고 내려오는 커피 방울까지 마시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벽을 타며 방울은 더 커져 가속도를 붙였다. 천천히 뭉쳐지던 커피들이 한순간에 하나로 합쳐지며 예기치 못하게 내려왔다. 이제 더 남지 않았단 걸 알면서도 입으로 후루룩 들이마셨다. 아무것도 빨려 들어오지 않았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손짓 같았다. 멍하니 흘려보내는 기다림 속에 벚꽃길 행사는 개막식을 알렸다. 점심시간이 지나 여유롭게 거니는 관광객들로 한산했던 길목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번잡하기 전에 다녀오려는 가족들은 분홍 꽃봉오리에 실망하며 산책길을 걸었다. 터질 듯 오므리고 있는 벚꽃은 신호등이 켜지지 않았다. 상인들은 모두 손님 끌기에 시끌시끌해졌다.
솜사탕집 쌍둥이네는 기계를 돌리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모양의 솜사탕을 만든다. 시끄러운 틈에 맡겨둘 곳 없어 따라 나온 쌍둥이는 어디 갔는지 알 길이 없다. 뒤편 풀숲에도 안보이고 길목 안쪽 장난감 가게 앞에도 보이지 않는다. 펭수, 마인크래프트, 뽀로로 모양 솜사탕을 모두 만들어 놓으니 아이 손님들이 엄마 손을 잡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벚꽃길 골목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줄 서 있는 상점이다. 쌍둥이 엄마는 바쁜 틈으로도 아이들을 연신 찾아보지만 걱정만 쌓이고 찾아볼 엄두를 못 낸다. 옆집 탕후루 내 젊은 처자한테 손님을 뺏기고 싶지 않다. 벚꽃길 매표소처럼 탕후루집과 솜사탕집으로 방문객들은 거쳐 간다. 옛날 군것질거리 파는 상점 황씨는 두 가게가 붙어 있는 거마저 맘에 안 든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타나 손님 다 데려가면 자기는 뭐 팔아 남기냐고 악을 쓴다. 이년 저년 욕을 하며 탕후루집 젊은 아가씨가 표적이 됐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 꼬부라진 목소리로 욕을 하니 당황하면서도 대꾸할 방도가 없다. 탕후루집 트럭을 주먹으로 쿵쿵 쳐대니 손님마저 떠나고 아가씨는 겁에 질렸다.
행사장 장사만 삼 년이 넘어가며 보아온 황씨 텃세는 항상 똑같다. 새로 들어오는 인기 많은 집 주인은 다 한 번씩 당하고 물러나니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오늘은 탕후루집이 물러설 차례다. 손에 들고 온 장난감 총은 위협하려는지 화가 나서 잡히는 대로 들고 왔는지 모른다. 막무가내 퍼붓는 욕은 탕후루집에 누구도 얼씬 못하게 으름장이라도 놓는 거 같다. 보고만 있던 쌍둥이네가 솜사탕 말려다 만 나무 꼬치로 황씨 팔을 때리며 맞대응한다.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황씨 때문에 솜사탕집 앞도 휑해지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탕후루가 뭔 잘못이냐며 한 덩치로 밀어붙이니 술에 취한 황씨가 정신이 드는지 뒷걸음질 치며 욕한다. 산전수전 겪으며 솜사탕 장비를 마련해 정착한 쌍둥이네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셋이다. 쌍둥이와 발을 헛디뎌 안전 그물대 없이 4층까지 올리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거동 못 하는 남편이 있다. 얼마 받지도 못한 보상비로 돌도 지나지 않은 자식 둘 먹여 살려야 해서 시작한 장사에 악이 바치듯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장난감 총을 들고 술주정 부리는 황씨 따위가 앞길을 막는 걸 놔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