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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Sep 24. 2024

차라리 안 보고 말지

질투에 관한 이야기 1

 쾌적한 집에 살며 편안한 일자리로 출퇴근한다 해도 경솔하게 동창회에 나갔다가 옛 친구 몇 명이 아주 매력적인 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우리 집보다 더 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이리 불행하냐는 생각에 시달려 정신을 못 가누기 십상일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P56 -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을 준거집단이라고 말한다. 내가 ‘질투’의 감정을 느끼는 상황도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준거집단 속에서 주로 조용하고 음흉하게 이루어진다. 준거집단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내가 낫다고 느낄 때 드는 고양감과 오만함, 아주 조금이라도 그 집단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 몰려오는 자괴감과 질투심, 아이와 같은 유치하고 민망한 마음이라 할지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삼성 이재용 회장이 작은 나라를 샀다고 해도 전혀 부럽지 않다.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만약 내 아들과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온갖 한심하고 유치한 성장 과정을 함께 걸어온 옆 동 아이가 중간고사에서 전 과목 100점을 받았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들은 한 바탕 피바람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아니!! 뭐가 부족해서?” 하며 풀리지 않는 질문의 답을 찾아 밤새 잠 못 이룰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인생 최초의 고백이다. 내가 속해있는 준거집단 중 가장 나를 미치게 했던 집단은 ‘동서, 도련님, 나, 남편’ 이렇게 4명으로 이루어진 준거집단이다.

 도련님과 남편은 같은 피를 이어받아 2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태어난 남자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성격과 외모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DNA의 단점을 극복한 훤칠한 키, 진취적이고 남성적이면서도 다정한 성격의 도련님. 누가 봐도 엄마 아빠 아들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아담한 키, 꾸밈없으면 다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재미없는 성격의 남편. 결정적으로 도련님의 경제적 능력은 내가 선택한 남자의 몇 배를 넘어서는 것 같다. 이건 그들이 누리는 삶을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나와 동갑인 동서는 나보다 훨씬 날씬하고 머리숱도 많다. 아무리 내가 새벽에 운동하고 바둥거려도 닿을 수 없는 어린이 몸무게의 소유자다. 언젠가, 孫子(손자)라는 한자를 못 읽는 것을 보고 나보다 지적이진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도련님 같은 남자를 선택한 걸 보면 삶의 지혜는 나보다 낫다. 성격도 솔직하고 단순해서 “명품 좋아하는 게 왜요? 왜 나쁜 거죠? 능력이 돼서 내 돈으로 사고 행복하게 쓰는데?” 하는 말을 당당하게 뱉는다. 내가 명품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 발언을 위선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이런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 정도 소신이면 명품 사야지. 응, 나쁜 거 아니야.’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련님의 자랑에 따르면, 집 안 청소도 너무 잘하고 음식도 잘한고 이해심도 깊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족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부인 칭찬을 늘어놓는 도련님의 멋진 소신이 또 부럽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웃고 있는 남편을 보며, ‘그렇게 자랑거리가 없니? 그 웃음의 의미, 까딱하면 오해하겠어.’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결국, 또 조용히 그녀의 선택을 질투한다. 배움과 지혜는 다른 영역의 것이 분명했다.      


 매해 여름, 겨울 휴가철이 되면 도련님네 가족들은 해외로 긴 여행을 떠난다. 덕분에 더운 여름, 추운 겨울에 생기는 시댁의 소소한 일들은 모두 내 차지가 된다. 어머님 아버님도 민망하신지 그들이 한국에 없다는 사실을 웬만하면 알리지 않으신다. 하지만 눈치 없는 DNA까지 물려받은 남편이 나에게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준다. 배움과 눈치의 영역도 전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아이를 낳고 10년 정도는 질투심에 불타서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불행이 커져가는 기분이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나마 내가 가진 소소한 행복이 몇 시간의 만남으로 퇴색될까 봐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내가 나를 아니까, 또 혼자 비교하고 질투하고 원망할 걸 아니까. 그들을 질투하는 내가 싫고, 혐오스러워서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고 글을 쓰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준거집단에서 느끼는 질투로 인한 불안을 철학적으로 표현해 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을 때는 내 ‘불안’의 정체를 알게 된 것 같아서 후련하고 안심이 되었다.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을 읽으면서는 작가의 친구 주디가 말한 것처럼 “질투심과 경쟁심을 끊어내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그것이 나의 자기혐오를 부채질하고 있었다”라는 위로를 들으며 자기혐오를 조금씩 내려놓았다.     


 단 한 번도 도련님 가족에 대한 질투심을 말이나 글로 표현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 이번 글을 쓰면서 내 안에 있는 어떤 차갑고 어두운 구석을 쳐다보고,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직시하고, 우리가 모두 마음에 지니고 있는 ‘질투’라는 본성에 작은 전등을 비추고 나니 이상하게 요동쳤던 감정이 고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미워했던 것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질투했던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나만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나만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누군가의 불행을 빌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질투심이 완전히 소멸되거나 뒤처지는 현실적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내 상처 입은 영혼이 잘 회복될 수 있도록 상처에 딱 맞는 약을 한 겹 발라주었다는 기분이 든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 마음의 이야기를 하얀 바탕의 페이지에 적어보길 잘했다.


‘쓰고 나니까 별 거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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