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감각> 앤 라모트 작가는 역경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 있는 한 인간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살다 보면 한쪽 손은 이쪽 바위 위에 얹고, 다른 쪽 손은 저쪽 바위 위에 얹은 채, 양쪽 엄지발가락으로는 잠깐이라도 디딜 만한 단단한 곳을 찾아 더듬거려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엄지발가락으로 더듬거리다가 디딜 만한 어떤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때가 되면 양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버틸 힘이 더는 없는데 어떡해서든 살려고 버둥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서, 혹은 그 모습을 보고 손 내미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느껴져서. 그 슬픔에 침잠되면, 누군가는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두 손을 거둘 결심을 할 수도 있다.
지인 중에 버티던 두 손을 끝내 놓아 버렸던 사람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 없이 커왔던 그 친구는 7살 어린 여동생을 홀로 보살피며 키웠다. 학교 가기 전, 서둘러 주먹밥을 만들어 동생의 입에 넣어주고, 동생 생일날에 누구보다 정성껏 음식을 차려 친구를 여럿 초대 한 적도 있었다. 혹여라도 여동생이 그릇된 길로 갈까 불안한 만큼 매일을 바쁘게 움직이며 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그때 그 친구를 살게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자기를 등진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에 더는 살아갈 힘을 불태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쓰고 버둥거려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모든 걸 포기하는 편이 더 쉽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파트 7층에서 몸을 던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고 신기하게 몸은 타박상 외에는 많이 다친 곳이 없었다.
‘아직 더 살아가야 하나, 세상이 나에게 디딜 만한 단단한 곳을 내어주려는 걸까, 여기서 다시 눈뜬 나는 더이상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글 쓰는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 친구의 인생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반짝이는 광산의 금맥 같은 것이었다.
“넌 왜 글을 쓰지 않아? 너의 모든 이야기가 네가 써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써줄래요? 내 이야기? 난 글을 못 쓰니까…. 근데 나 같은 사람은 나처럼 고생만 하는 이야기는 읽기 싫어요. 그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할 것 같지 않은데? 오히려 누나처럼 밝은 사람들이 쓴 글이 더 좋아요. 내가 놓치거나 스치고 온 행운에 관한 이야기, 나는 하지 못한 고민에 대한 흔적이 있잖아요. 누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뚜렷하게 ‘역경’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경험이 없는 난,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쓸만한 것들이 있긴 있을까, 난 어떤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길 기대하는 걸까.
한동안 내 글의 독자가 될 사람들에 대해 골몰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속 글을 쓰다 보니 내가 글을 쓸 때 떠올리는 독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머물게 되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오면서 생겼던 상처들, 남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아오면서도, 너무 흔한 상처일까 봐, 너무 별 볼 일 없는 아픔일까 봐,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고통일까 봐 홀로 부둥켜안고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40대가 되어 내 과거를 돌아보니, 너무도 평범하고 어떤 색채도 없어 나 자신조차도 들여다보기 지루했다.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일들로 모든 에피소드를 채우게 생겼다는 생각에, 막막하고 우울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별 일없이 지내온 나도 이상하게 마음은 슬프고, 답답했다. 가끔은 이유 모를 감정들의 뒤섞임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대상도 흐릿한 미움으로 눈물이 나서 죄책감에 시달리고, 감사할 일 투성이인데 감사하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자책하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조금씩 글을 써가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내 곁에 혹은 어딘가에 많지 않을까?
햇살이 가득한 어느 날 손에 종량제 봉투에 담긴 먹거리들을 들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울컥 차오르는 눈물로 털썩 주저앉게 되는 사람들. 맥주 두 캔과 과자 몇 봉지가 든 비닐을 들고 걸어가는 어느 부부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모를 눈물을 주룩 흘려본 적이 있는 사람들. 왜인지도 모르겠는 슬픔을 시작으로 하루가 통째로 우울해지는 사람들. 난 어디까지 왔을까, 난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계속 갈 수 있을까. 아무와도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 분명 그런 사람들은 나의 글을 읽어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