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미술의 특징 중 하나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하는 것. 위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가 이런 묘사에 제일 능했었지. 혹시 또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음... 글쎄?"
왼쪽 <의심하는 도마> 알브레히트 뒤러, 1509 / 오른쪽 <의심하는 도마> 램브란트, 1634
"비슷한 시기의 같은 주제의 그림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느낌이 올 거야."
"아 예수가 중앙에 있고 후광이 있는 게 다르네."
"맞아. 카라바조는 예수와 제자들을 세속적으로 표현했어. 그리고 마치 영화를 찍듯이 인물들의 상반신만 그려서 현장감을 불어넣고 빛과 시선들을 한곳에 집중시키면서 예수의 상처를 더욱 부각시켰지."
"오... 전체적인 조화로움보다는 어딘가에 꽂히게 만든다는 거구나. 기법이 특이하네."
"그치? 그리고 내가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어."
"뭔데?"
"자기가 카라바조의 의도대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뭐가 제일 눈에 띄는 것 같아?"
"예수의 상처... 아닌가? 종교적인 측면이나 작품의 주제도 그렇고."
의심하는 토마
"난 사실 상처보다는 도마의 '의심하는 표정'에 더 눈이 가거든. "이보다 더 격렬하게 의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단 말이지."
"의심하는 게 왜?
"근대로 넘어가는 그 당시의 지식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인류 역사상 가장 의심을 많이, 또 깊이 했던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철학자 '데카르트'일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철학가적 기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온 그는 어린 시절 "정말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셨을까?"과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신 중심의 진리관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신교 사이에 종교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가 어떻게 근대 철학의 효시가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의심을 날려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명제'를 찾아내고자 했다.
<방법서설> 중 눈에 대한 연구 (출처 paixaube.tistory.com/173)
가장 먼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데카르트는 철학자이기도 했지만 과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저서 <방법서설>을 보면, 위와 같이 눈의 해부학적 구조와 원리, 렌즈와 굴절에 대한 연구 등 그가 이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상이 뒤집힌 채 망막이 맺힌 후 뇌에서 보정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인간의 감각은 확실한가?"
실제로 인간의 감각은 완전하지 않다.
감각은 상대적이며 때때로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의 과정 속에서 데카르트는 반박할 수 없는 명제를 찾아냈다.
"감각이 틀릴지언정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몸은 실재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던 명제는 금세 또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확실히 실재하는가?"
그는 몸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꿈의 가설'이라고 부르며, 꿈속에서도 내가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듯, 몸이 실재한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사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라는 의심이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엇일까.
바로 꿈속에서도 볼 수 있는 사물의 형태, 숫자, 길이와 같은 보편성을 가진 것들이다.
다시 말해, '3'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우리가 피자를 세 조각을 먹는 꿈이 생겨날 수 없으니, 이것이 꿈이든 아니든 '3'이라는 숫자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데카르트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의문을 가졌다.
위 과정과 유사하게 데카르트는 '3'이라는 숫자가 확실히 실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는 사실 형태, 숫자, 길이와 같은 것들도 악마가 인간을 기만한 결과이며, 어쩌면 우리가 속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3'이라는 숫자가 사실은 '2'나 '4'일 수도 있으며, '3+3=6'과 같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수학적 진리조차 참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쯤 되면 데카르트의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차분하게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명제는 무엇일까?"
그의 결론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 의심하는 나, 생각하는 나, 악마에게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이와 같이 결론지었다.
"이게 그런 뜻이었구나!"
아내가 말했다.
"응.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이를 도출해 내는 과정을 보면 데카르트가 왜 유명한 철학자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지."
"정말로 도마의 표정이 데카르트와 오버랩되는 느낌이기도 하네."
"그치? 난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아. 근데 사실 카라바조가 데카르트보다는 더 옛날 사람이야. 그가 데카르트를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린 건 아닌 거지."
"아 그래?"
"응. 그렇지만 카라바조도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어렸을 때 불우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고 여러 사건 사고에 휘말렸거든. 무명 화가인 시절도 있었고. 아마 '비운의 천재'라는 말이 제일 잘 들어맞는 사람인 것 같아. 힘들게 얻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기도 했으니까."
"헉 어쩌다가?"
<마태오의 소명> 카라바조, 1599~1600 (출처 en.wikipedia.org)
"일단 카라바조가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이 작품은 덕분이야. 그의 초기작 <마태오의 소명>.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을 그린 그림이지."
"이 작품도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그치?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은 느낌이지. 근데 이 작품에도 작은 논란이 있어."
"어떤 논란?"
"마태오가 누군지 명확하지 않다는 거야. 그림을 보면 예수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마태오를 지목하고 있잖아? 자긴 손이 누굴 가리키는 것같아?"
"수염 난 남자 아니야? 예수를 보며 "헉, 저요?"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언뜻 보면 그게 가장 그럴 듯 하지. 근데 잘 보면 수염 난 남자의 손가락이 맨 끝의 젊은 남자를 가리키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원근감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 같네."
"마태오는 세금징수를 하는 사람이었어. 정해진 금액만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져가다 보니 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속물이었지. 맨 끝에서 예수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돈 세고 있는 젊은 남자. 한쪽 손에는 돈 주머니까지 챙기고 있는 그가 마태오라는 의견도 있어."
"오... 이게 더 그럴듯하기도 한데?"
"근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게 있어. 카라바조가 1년 뒤에 <마태오와 천사>라는 작품을 그리는데, 이 그림에서의 마태오는 젊은 남자 옆에 서있는 안경 낀 남자와 가장 비슷해."
"그럼 대체 누구지?"
<마태오의 소명> X-ray 촬영
"정확히 결론 나지는 않았어. 그리고 작품을 X-ray로 촬영해 보니 예수의 손가락 방향이 세 번이나 수정된 것도 알아냈지."
"재밌네."
"그치? 카라바조는 이 그림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돼. 다만 그는 성격이 워낙 폭력적이고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어. 명성에 맞지 않게 로마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렸는데 그때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었지."
"후원자들도 한편으론 불안했겠네."
"그랬을 거야.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태였던 거지."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카라바조, 1601 (출처 en.wikipedia.org)
"이후의 작품들은 그런 그의 인생을 더 잘 담고 있어. 이 작품은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라는 작품이야.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놀라는 장면을 그린거지. 자긴 작품이 어떤 것 같아?"
"확실히 이전 그림과 달리 동작들이 역동적이네. 그리고 왠지 많이 봐왔던 예수님의 모습이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한눈에 봐도 그렇지? 일단 카라바조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예수의 후광을 없앴어. 카라바조가 전통적인 묘사 방식과 이별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 또 카라바조는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어. 대부분 그가 도박판이나 술판이 벌어지던 뒷골목에서 보던 사람들이지."
"아 그래서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드는구나."
"응. 신성함이 사라진거지. 예수는 수염이 없고 여성적으로 그려졌고, 제자들도 신성한 사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하층민이었던 본래 그들의 모습과 닮아있어."
"카라바조가 종교적인 회의감이 있었던 건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에 있는 존재라고 봤던 거야. 이건 아마도 그의 이중적인 삶이 영향을 주었을 거야. 당시 추기경의 후원으로 상류 사회를 접함과 동시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천박한 삶을 살았으니까."
"아... 교회에서 이런 그림은 불편하게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맞아. 카라바조는 당시 로마에서 활동했어. 아무리 종교개혁이 있었다고 해도 로마에서는 교회가 여전히 막강했지. 그리고 결국엔 카라바조의 화풍이 문제를 일으키게 돼."
<성모의 죽음> 카라바조, 1604~6 (출처 en.wikipedia.org)
위 작품은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대형 제단화이다.
당시 성당이 있던 지역은 로마의 빈민가였으며, 성직자들이 빈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만큼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던 의뢰인들은 성모의 죽음이 영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원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작품이 공개되자 의뢰인들은 경악했고, 작품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작품을 거부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묘사 때문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카라바조는 성경의 내용과 무관하게 익사한 임산부를 등장시켰다.
더욱이 카라바조는 그가 사랑했던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다.
또한,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관례를 어겨버렸다.
아무리 주제가 성모의 죽음이더라도 실제 죽음을 묘사하지 않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는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것처럼 보였고, 퉁퉁 불어버린 발을 내보이고 침대 위에 숨진 채 누워있었다.
<성모의 죽음> 카를로 사라체니, 1610 (출처 en.wikipedia.org)
종교계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성모와 매춘부 사이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파괴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제단화는 철거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으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라바조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는 이 시기에 살인을 저지르며 도피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물론 카라바조가 작품을 그리며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부딪히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도제 시절을 겪던 그에게 이제 막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하늘과 땅, 즉 신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을 것이다.
베드로도 본래 어부였고, 마태오도 세금징수원이지 않았는가.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모델로 한 성모를 그림으로써, 그리고 실제 죽음의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애끓는 슬픔을 느끼도록 하고자 했다.
이에 통속적인 표현 방법을 썼으며, <성모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것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다.
어떤 이의 종말은 다른 이의 애도로만 이어질 뿐이라는 '죽음의 본질' 말이다.
그의 눈에 성모의 죽음과 매춘부의 죽음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어떠했든, 교회는 더 이상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교회의 당위성이 계속해서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어 성경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지만, 어디에도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던 데카르트의 말처럼,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내셔널 지오그래픽 400주년 (출처 amkorinstory.com/2287)
이러한 종교적 회의감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단연코 '과학'이었다.
카라바조가 사망할 즈음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발명했다.
사람들은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을 관찰하며 천사를 찾았지만, 아무리 확대해도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외려 그들이 하늘에서 찾은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지구였다.
산과 바다, 바위들이 지구에 있는 것처럼 하늘 위에도 그러한 것들이 존재했다.
더욱이 갈릴레오는 행성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지동설'이 타당함을 입증했다.
신이 만든 만물의 중심이었던 지구는 100여 년 전 코페르니쿠스의 말대로 그저 태양을 공전하는 여러 행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