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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작가 Feb 11. 2024

천재가 남긴 미완성의 수수께끼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 작품은 왜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을까?"
유난히 번잡한 <모나리자> 작품 앞에 선 아내가 말했다.


"모나리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정말 많지. 작품의 도난, 그림의 실제 모델, 신비로운 표정과 시선, 각종 음모론들..."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냥 초상화 자체를 봤을 때 토록 가치 있는 이유가 뭔지를 잘 모르겠어."

"음 내가 미술 작품이 단순히 '예쁜 그림'이 아니라고 했었잖아?"

"작품 표면 너머에 화가가 있고 시대와 역사가 있다고 했지."

"맞아. 그래서 자기한테 작품 설명을 해줄 때 항상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데 레오나르도는 조금 달라."

"어떤 게?"

"시대적 배경보단 레오나르도라는 사람 자체를 알아야 해. 그의 인생을 봐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화가랄까. <모나리자>가 사실 미완성작인 거 알아?"

"아 그래?"

"응.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를 그린 기간이 16년 정도 돼. 그가 죽었을 때 작품이 작업실에 있었거든. 끝내 의뢰인에게 초상화를 전달하지 못한 거지."

"왜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대?"

"그게 이 작품이 엄청난 가치를 가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음악가 등 온갖 꼬리표와 지성을 겸비한 천재가 죽기 직전까지 <모나리자>라는 작품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고민했다는 것."




우리에게 흔히 '다빈치'라고 알려진 이 화가는 1452년에 태어났다.

(사실 '다빈치'는 성이 아닌 '빈치(Vinci) 출신 사람'이라는 뜻으로 레오나르도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빈치 인근에 살던 가난했던 고아였다.

다시 말해, 그들이 결혼할 가능성은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사생아'였다.

다행인 것은 그가 공증인의 길을 걷도록 강요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케케묵은 인문학과 고전을 배우는 라틴어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어린 레오나르도는 항상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궁금한 것과 그에 대한 실험 방안 등을 적어두었다.


피렌체 대성당


12살이 되자 그는 피렌체로 이주했다.

피렌체는 그가 화가로서 성장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당시 수많은 예술가들의 공방이 있었으며, 통치 세력이었던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문화 발전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왼쪽 <투구를 쓴 전사> , 오른쪽 <아르노강 골짜기 풍경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기작


레오나르도는 공증인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예술가 '베로키오'에게 도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표면 해부학, 기계학, 소묘 기법, 빛의 묘사 등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곳에서 레오나르도는 스승의 조각 작품의 영향이 묻어나는 <투구를 쓴 전사>, 대기원근법과 인상주의적 전경을 느껴볼 수 있는 <아르노강 골짜기 풍경화> 등의 초기작을 그려냈다.

또한 어린 레오나르도는 스승과 동료들이 있던 작업실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제교육을 마친 뒤에도 스승의 작업실에 남아 여러 작품을 같이 그려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18살쯤 될 무렵, 그는 스승을 뛰어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출처 ko.wikipedia.org)


"어느 부분에서 스승을 뛰어넘은 거야?"
아내가 물었다.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보고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고 말했대. 그림을 잘 보면 이런 스승의 감정을 드러내는 등장인물이 있어."

"음... 천사인가?"

레오나르도의 천사(왼쪽), 스승 베로키오의 천사(오른쪽)

"맞아. 왼쪽이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이고 오른쪽 베로키오가 그린 천사야. 베로키오가 그린 천사의 표정이 어떤 것 같아?"

"멍해 보이는 표정이랄까?"

"약간 충격받은 것 같지 않아? 베로키오는 아마 레오나르도의 표현 방식에 감탄했을 거야. 당시 회화 교과서였던 알베르티의 [회화론]에 따르면, 형태의 윤곽을 선으로 그리도록 했거든. 베로키오의 천사의 눈이나 턱 쪽을 보면 선으로 표현된 붓터치가 보이지?"

"오 그러네."

"반면에 레오나르도의 천사를 보면 명확한 윤곽선이 없어. 그가 실험을 통해 새로운 기법을 발명해 낸 거지. 이걸 '스푸마토 기법'이라고도 해. 관련된 내용이 그의 노트에도 적혀있어."


"선명하고 투박한 선으로 윤곽과 형태를 그리는 대신
경계선을 연기처럼 흐릿하게 그려라."

"레오나르도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잘 된 일이야. 그는 기존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항상 본인만의 탐구 방식을 통해 이론을 발전시켰거든."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독립한 것은 25살 무렵이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가 독립 후 5년 동안 의뢰받은 작품은 단 세 점이었다.

그 세 점 중 하나는 시작도 안 했고, 나머지 두 점도 미완성작이다.

의뢰를 받아놓고 시작도 안 하는 게 말이 되나 싶긴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가 산만해 어느 하나에 몰두하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작품이 완벽하지 않으면 의뢰인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미완성작 중 한 점은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작품이다.

의뢰를 받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의뢰인인 산도나토 수도원 수사들이 아버지의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당시 인기 있던 주제였다.

세 명의 현자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으로와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바치는 순간이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이 그림을 그렸다.

화가 보티첼리는 이 그림에 메디치 가문을 등장시켜 경의를 표하며 권력자의 환심을 샀고 많은 후원을 받기도 했다.

반면, 레오나르도는 후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후원자를 찾아다녔지만, 후원자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했다.


<동방박사의 경배> 준비 그림. 레오나르도 (출처 veritas.catholic.or.kr)


위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미완성작 <동방박사의 경배>의 준비 그림이다.

그는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방식에 따라 이 준비 그림에 투시선을 그려 넣은 뒤 배경을 완성하고 인물들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색이 시작될 즈음 작업은 중단되었다.


이 작품은 근면성실하지 못한 그에게 너무 복잡했다.

일단 예순 명의 각기 다른 표정과 모델이 필요했으니 작업량이 많았다.

또, 빛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빛이 비치는 동시에 서로 영향을 받으며 상호작용하는 빛과 그림자를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레오나르도는 정확한 빛을 구현할 능력이 부족했고,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결국 작품을 완성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그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향했다.

사실 그가 밀라노로 간 것은 당시 피렌체의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메디치가 밀라노에 보낸 외교적 선물이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국가들 간의 경쟁, 동맹 관계를 잘 헤쳐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오나르도가 '음악가'로서 보내졌다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훌륭한 '리라 연주자'로서 밀라노에 보내졌다.


밀라노로 가는 길에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의 실제 거리가 얼마인지 궁금했고, 이에 수레바퀴의 회전수를 이용한 주행거리계를 발명했다.

그리고 180마일이라는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계산해 냈다.

레오나르도는 언제나 순수한 호기심에 이끌리던 사람이었다.


밀라노에 도착한 뒤 그는 구직을 위한 편지를 보냈다.

당시 통치자였던 루도비코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사뭇 진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는 평소와 다르게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 즉 일반적인 방향으로 작성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왼손잡이였으며, 그의 노트는 모두 반대 방향으로 적혀있다.)


군사공학과 관련된 그의 노트들 (출처 italian-renaissance-art.com)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군사공학자로서 채용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교량의 설계, 대포, 장갑차, 선박의 제작법 등 자신의 지식을 어필하는 한편, 그는 자신이 그린 작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밀라노로 파견된 표면적인 이유인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재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짤막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또한 저는 대리석, 청동, 점토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저는 뭐든 다 그릴 수 있습니다. 누구와 비교해도 재주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

이런 레오나르도의 제안은 루도비코에게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군사공학자가 아닌 궁정 야외극 제작자로서 궁정에 입성했다.

레오나르도가 좌절한 것은 아니다.

무대 디자인, 의상, 배경, 메커니즘, 우화점 암시, 기계장치 등 역시 그의 관심사였다.

궁정의 여러 행사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 껏 발휘했고 그 결과 야외극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노트 속 그로테스크한 인물


물론, 연극 제작 일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얼굴의 특징과 내적 감정 간 연관성을 탐구했다.

레오나르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모델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며 그들의 다양한 감정, 몸짓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위 그림에 보이는 그의 연구는 여러 대작을 그리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무렵 건축가로서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는 당시 건축가 친구들인 도나토 브라만테, 프란체스코 디조르조와 교회를 디자인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비트루비우스'였다.

비트루비우스는 로마군의 장교였으며 포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건축 서적 [건축론]을 집필한 것인데, 그의 책에는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지구라는 대우주 간의 유사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건축론에 무슨 우주까지 등장하는 거야?"
아내가 물었다.


"음... 지금 보면 조금 낯설지. 비트루비우스는 신전을 설계할 때 인체의 비율을 고려해서 균형 잡힌 건축을 해야 한다고 했어."

"그게 말이 되나?"

프란체스코 디조르조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출처 http://edunanum.com )

"고대 그리스 조각들을 보면 엄격한 비율을 가지고 조각상들을 만들었잖아? 그만큼 사람들이 인체에 관심이 많았던 거지. 그러다가 우주의 비밀도 우리 인체에 숨어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교회를 건축할 때도 인체의 비율에 따라 건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말 그대로 인본주의네."


레오나르도 노트 속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그치.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 자신이 탐구한 내용을 더해서 노트에 남겼어. 자기도 이 그림은 본 적 있지?"

"응. 이건 황금비와 관련된 내용으로 알고 있었는데."

"맞아. 레오나르도는 [건축론]의 내용을 토대로 실제로 실험하면서 자신만의 비율을 완성해 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했어. 소우주와 대우주의 관계, 건축에서 정사각형과 원의 기하학,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황금비와 같은 과학과 예술이 결합된 개념들이야."

"아 이 그림이 그런 뜻이었구나."




어느덧 7년의 세월 흘렀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마침내 도비코로부터 첫 의뢰받았다.

루도비코 대공의 부친을 기리기 위한 대형 청동 기마상이었다.

그가 의뢰를 받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무엇일까?


세상 그 어떤 예술가도 이런 방식을 택한 적이 없지만, 그는 먼저 말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의 어느 한 부분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완벽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산만했다.

해부할 말을 기르며 마구간을 청결하게 만드는 법, 먹이통을 쉽게 채우는 법, 수문과 경사로를 통해 마분을 씻어내는 장치 시설을 고안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데 정작 기마상에는 진전이 없었다.

의뢰인의 인내심은 이내 한계에 다달았다.

실제로 참다못한 루도비코가 피렌체의 로렌초 데메디치에게 작품을 완성할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실제 크기의 점토 원형이 공개되었다.

약 7m 높이의 기마상은 사람들을 압도했으며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이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조각가로서의 명성도 갖게 되었지만, 결국 기마상은 완성되지 못했다.


기마상을 위한 레오나르도의 습작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입하면서 작품에 쓰일 청동으로 포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실의에 빠졌다.

“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시기가 어떤지 알고 있으니까요.”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에게 보낸 편지 내용)


이로부터 1년 뒤, 레오나르도는 또 다른 작품을 의뢰받았다.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

루도비코는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북쪽 벽에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릴 것을 의뢰했다.


<최후의 만찬>은 벽화였기 때문에 작업실이 아닌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레오나르도의 작업 방식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성당 사제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날에는 그 임시 구조물에 올라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을 비평하며 한두 시간씩 그림 앞에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낮에 갑자기 그가 나타나 인물 위에 한두 번 붓질한 후 서둘러 떠났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하루종일 붓질을 할 때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의뢰인의 애간장을 태웠다.

결국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호출했고, 합의된 기간 안에 작업을 마치기로 계약서를 수정했다.

그리고 1498년, 마침내 그의 걸작이 완성되었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1498 (출처 wikipedia.org)


이 그림은 예수께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하리라."라고 말한 직후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등장인물들의 동작과 감정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연극 무대의 동선을 짜는 것처럼 작품을 연출했다.

작품에는 인공적인 무대 연출, 과장된 동작, 속임수 같은 원근법, 손동작의 연극성 등 야외극의 제작자로 일했던 레오나르도의 경험이 녹아 있다.

열 두 제자들은 각각 세 명씩 모여있으며, 각각 다른 표정과 몸짓은 관람자를 집중시킨다.


가장 왼쪽엔 순서대로 바르톨로메오, 안드레아, 야고보가 모여있는데, 모두 놀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바르톨로메오는 손으로 책상을 치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뛰쳐나갈 것 같은 운동감을 보여준다.


그다음엔 차례대로 베드로, 유다, 요한이 있다.

가장 오른쪽의 요한은 슬퍼하면서도 막을 수 없는 현실에 체념한 듯하다.

다혈질의 베드로의 몸은 곧바로 이러한 요한에게 달려가고 있으며, 그의 오른손의 칼은 그가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베드로가 무심코 앞으로 밀어낸 유다 만이 아무런 몸짓이 없고 질문도 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유다만이 이 그림에서 그 누구와도 상호작용을 하고 있지 않다.

소극적인 표정과 은화 주머니를 꽉 쥔 손을 통해 유다의 긴장감이 나타나며, 그의 왼손이 예수가 나누었던 빵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의 바로 오른편에는 도마, 야고보, 빌립보가 있다.

도마는 검지를 세우고 있는 제스처를 보이는데, 이는 레오나르도와 인연이 깊은 손짓이다.

그의 작품 속 많이 등장하는 제스처이기도 하며, 그의 제자인 라파엘로는 대작 <아테네 학당>에서 같은 제스처를 하고 있는 레오나르도를 모델로 하여 플라톤을 묘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마태오, 타대오, 시몬이 보인다.

그들은 예수가 한 말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둥글게 말린 타대오의 손은 마치 "이럴 줄 알았어"와 같이 말하는 듯하며, 마태오의 손짓은 마치 유다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작품에 적용된 원근법 또한 흥미롭다.

예수의 이마를 소실점으로 하고 있으며, 자연 채광을 통해 예수의 후광을 표현했다.

예수를 중심으로 세 명씩 상호작용하고 있는 열 두 제자의 배치는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원근법을 구현하는 데 있어 레오나르도에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작품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당시 레오나르도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 어떤 표면도 정확히 원래 모습대로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눈이 그림의 모든 가장자리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관람자로부터 그림 중앙까지의 거리(위 그림의 1)와 가장자리까지의 거리(위 그림의 2)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 과정 자체에서도 원근에 의한 왜곡이 일어나며, 관람자 위치에 따라서 이 왜곡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이다. (1과 2의 차이가 작아질수록 왜곡이 적다.)


레오나르도는 원근법 측면에서 이상적인 감상 위치를 그림의 너비, 길이보다 스무 배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최후의 만찬의 경우에는 그림으로부터 180m가 떨어진 위치이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레오나르도는 착시를 유발하는 속임수를 사용했다.

그는 벽면과 천장이 원래보다 더 빠르게 소실점을 향해 후퇴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화가가 수학도 잘하면 이런 작품이 나오는구나."
아내가 말했다.


"그치? 그는 야외극에서 힌트를 얻었어. 사실 이러한 방식은 그가 연극 무대에서 자주 사용했던 방법이었거든. 야외극을 제작했던 게 허송세월을 보낸 게 아니었던 거지."

"이게 그렇게 연결이 되다니."

"한 가지 아쉬운 건 작품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거야."

"침략을 당했나?"

"그건 아니야. 작품을 완성하고 1년 뒤에 프랑스 루이 12세가 밀라노에 쳐들어오기는 했는데, 오히려 레오나르도를 보호하려고 했거든. 루이 12세가 작품을 보고 프랑스로 가져갈 수 있냐고 묻기까지 했었대."

"그래서 프랑스로 가져간 거야?"

"아니. 벽화라서 가져가는 게 불가능했어."

"그럼 왜 훼손이 된 거지?"

"레오나르도가 실험을 했거든. 그는 벽화를 그려본 적이 없었고 관련 기술을 배운 적도 없었어. 당시 벽화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했는데 느긋한 레오나르도와는 맞지 않았지.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템페라와 유화의 방식으로 벽화를 그렸어. 그리고 20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 그림이 망가지기 시작했대."

"아이구..."

"아마 사제들의 증언처럼 레오나르도가 느긋하게 작업했던 것도 이 때문일 거야. 벽화를 이런 식으로 그린 건 되게 실험적인 방식이었거든."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키고 대외환경이 복잡해지자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돌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이때부터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붓을 잡는 일은 드물었다.

대신 새로운 후원자인 보르자를 따라다니며 군사 발명품, 운하 건설, 도시 계획 등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3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미술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세기의 대결'이 펼쳐지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레오나르도는 1503년 10월 피렌체의 궁전 회의실 벽화를 의뢰받았다.

피렌체의 지도자들은 밀라노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자축하는 작품을 그리기를 원했다.


<앙기아리 전투> 준비 그림


그에게 있어 이번 의뢰는 순조로울 법도 했다.

말에 관해서는 이미 전문가였으며, 인물들의 표정, 감정 묘사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번에도 느긋했다.

마감일이 도래했지만 그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레오나르도가 여전히 애를 먹고 있을 때, 그등 뒤에서 레오나르도를 따갑게 쳐다보는 한 젊은 남자가 있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였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악연으로 유명하다.

레오나르도는 다른 예술가를 비난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미켈란젤로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회화가 조각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예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을 높이 사지 않았고, 그림마저 조각처럼 그리는 미켈란젤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비드>, 미켈란젤로 (출처 wikipedia.org)


레오나르도는 그의 작품이 눈에 띄는 것조차 싫었던 모양이다.

미켈란젤로의 대작 '다비드'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다비드'상이 공개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자, 작품의 위치를 정할 피렌체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연하게도 미켈란젤로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광장에 작품을 설치하길 원했다.

하지만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미켈란젤로도 이런 레오나르도를 좋아할 수 없었다.


시뇨리아 궁전의 의뢰인들은 이러한 배경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두 예술가 사이에 경쟁의식을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쪽 벽화를 맡겼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과제는 1364년 피사를 상대로 승리한 '카시나 전투'였다.


왼쪽 :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 복제화, 오른쪽 :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복제화


그렇게 세기의 대결이 시작되었지만, 결말은 밋밋했다.

두 작품 모두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후배들이 남긴 복제화를 통해 어렴풋이 두 대작을 감상하며 두 천재가 어떻게 달랐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두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은 이유는 이렇다.

벽화 작업이 시작될 무렵 미켈란젤로는 무려 교황이라는 후원자로부터 무덤을 조각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미켈란젤로가 자리를 비우자 레오나르도는 잠시 동안 기운을 내서 벽화에 매달렸지만, 교황과 사이가 틀어진 미켈란젤로가 다시 피렌체로 돌아오자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를 떠났다.


시스티나 천장화, 미켈란젤로, 1508~1512 (출처 https://somgle.tistory.com/304)

그 이후 미켈란젤로도 다시 로마로 돌아갔고 그는 인생 최대의 역작인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이후 10여 년 간 로마와 밀라노를 오가며 생활했다.

그는 20여 년 전 자신이 몰두했었던 해부학 연구를 다시 이어하기도 했고, 수력학, 물리학, 천문학, 광학, 화석 연구 등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며 그의 노트를 채워갔다.

전해지는 노트의 내용을 살펴보면 놀랄만한 내용들이 많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노트를 적는 노력의 1/10 정도를 논문을 출간하는데 썼다면, 인류 문명의 발전이 수백 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노트 속 해부학


먼저, 그의 해부학적 업적이다.

레오나르도는 240개의 인체 해부도를 그렸고 13,000 단어에 달하는 글을 남겼다.

주요 업적은 대동맥판막의 작동 방식을 발견한 것인데, 해부학자들이 그의 말을 증명한 건 1960년의 일이다.

무려 450년이 걸렸다.

그는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노트에는 당시 천동설을 부정하듯,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달이 스스로 빛나지 않으며 달빛은 그저 태양 빛의 반사를 통해 온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는 하늘이 왜 파란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빛의 산란 현상에 대해서도 관찰했으며, 산 꼭대기의 물고기, 조개류의 화석을 분석하며, 성경 속 대홍수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왼쪽 : 레오나르도 노트 속 새 연구, 오른쪽 : 나선추진기를 이용한 영구 운동


마지막으로 그의 노트에는 200년쯤 후배인 뉴턴의 운동 법칙을 예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새가 하늘에 떠있는 것을 보며 날개와 공기 간에 작용과 반작용이 있음을 알아냈고, 기계학을 공부하며 "움직이는 물체는 출발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이동 경로를 유지하려 한다"라고 적었다.

바로 뉴턴의 '관성의 법칙'이다.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출처 wikipedia.org)


자, 이제 다시 <모나리자> 앞에 서보자.

우리는 이제 막 짧게나마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이 작품은 미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레오나르도는 붓질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최대 서른 번에 걸쳐 아주 얇게 덧칠함으로써 깊이감과 명도, 입체감을 극대화시켰다.

그 결과, 그는 르네상스 미술에 정점을 찍었다.

그림 속 리자(Lisa) 부인은 생전의 그녀를 보듯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얼굴에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교묘하게 빛과 그림자를 활용했으며, 그녀의 옷과 잔주름, 목둘레선에서는 놀랍도록 정교한 묘사를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어려서부터 연구했던 스푸마토 기법과 해부학적 지식은 그녀의 신비로운 미소를 만들어냈고, 지질학적 연구와 공기원근법 또한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렇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모나리자>가 그토록 가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품의 표면 너머에는 ‘화가’가 있고, 화가가 살아갔던 ‘시대’가 있고, 시대가 흘러 쌓여버린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미술사에는 이따금씩 화가의 인생 자체가 담겨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모나리자>는 그런 작품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에는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키우는 데 한평생을 바친 레오나르도의 순수의 호기심이 담겨있다.


더욱이 <모나리자>는 미완성작이다.

그는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키고 피렌체에 돌아와서부터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6년이 지나도록 작품이 모델인 리자 델조콘도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는 작업실에 남아있는 이 작품을 보며 무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출처 namu.wiki )


대체 그가 죽음의 문턱 앞에서까지 이 작품에 무엇을 더하려고 했던 것일까?

천재는 미완성의 수수께끼를 남기고 떠나갔다.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은 수수께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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