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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능 Jan 28. 2024

북유럽 르네상스 : 붓 터치에 담긴 비밀

아르놀피니의 그리움

"Oil on canvas? 이건 무슨 뜻이야?"
아내가 물었다.


출처. 나


"유화라는 뜻이야. 색소에 기름을 섞어서 만든 물감을 사용한 거지."

"아... 다른 걸 섞기도 하는 건가?"

"맞아. 처음엔 물이나 달걀을 섞어서 썼어. 그러다 유화가 생겨난 건데 이게 미술사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어."

"어떻게?"

"정교한 묘사가 가능해졌거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먼저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였을까.

현재까지의 증거로 보자면 어느 이름 모를 석기시대인이다.

그렇다면 그 어떻게 동굴 벽화를 그렸을까?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연을 최대한 활용했다.

흙, 식물, 광물 등 다양한 재료의 색소에 물이나 동물의 점액을 섞어 색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완전하지 못했다.


여기서 조금 발전된 것이 '템페라'와 '프레스코'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색채 가루에 달걀이나 벌꿀, 등을 섞어 안료가 더 잘 착색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고착제'를 섞어 쓰는 것이 '템페라'이며 르네상스 초기까지 많은 화가들이 템페라화를 그렸다.

'프레스코'는 아직 마르지 않은 회반죽 벽에 물에 녹인 안료를 입히는 방식이다.

프레스코는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템페라에 비해 보존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템페라와 프레스코는 빠르게 건조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수정하기가 어려웠고 정교한 작업을 하기 부적합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것이 '유화'이다.

유화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유화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얀 반 에이크'이다.

유화는 템페라나 프레스코에 비해 물감이 천천히 건조된다.

이에 따라 세밀한 작업이 가능해졌고, 여러 번 덧칠함으로써 광택 있는 색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Madonna of Chancellor Rolin>, 얀 반 에이크, 1435 (출처 en.wikipedia.org)


위 그림은 얀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재무장관인 '니콜라 롤랭'이 의뢰하여 제작된 작품이다.

작품은 신앙심이 없던 니콜라 롤랭이 성모 마리아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장면을 주제로 한다.

주제에 따라 근엄한 표정의 성모와 아기 예수가 니콜라 롤랭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천사의 날개를 통해 이 구원의 장면이 하느님께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 볼 점은 '세밀한 묘사'이다.

인물의 표정, 옷감의 표현, 멀리 보이는 배경 등 화가가 캔버스의 모든 부분에 심혈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얀 반 에이크는 유화의 특징을 살려 많은 상징을 그려 넣었는데 그중 '칠죄종'의 표현을 주목해 볼 만하다.

( *칠죄종 - 교만, 시기, 탐욕, 분노, 색욕, 나태, 인색 )


먼저 롤랭의 머리 위에 보이는 부조를 살펴보자.

다른 기둥들과는 다르게, 화가는 이 부조들에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가장 왼쪽에는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보이는 데 이는 '교만'을 상징한다.

바로 오른편에는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모습이 보이는 데 이는 '시기'를 뜻하며, 마지막의 술 취한 노아 이야기는 '탐욕'을 상징한다.

또한, 롤랭의 뒤편 기둥 부조에는 작게 사자 머리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분노'를 나타내며, 롤랭의 기도서 앞의 기둥에 짓눌린 토끼는 '색욕'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재무장관을 하며 부를 축적한 롤랭 자신이 '인색'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화면 중앙에 위치한 얀 반 에이크와 그의 형이 '나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은 중세 시대부터 그려져 왔다.

얀 반 에이크 또한 종교화와 세속화를 모두 그렸던 화가였기에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은 아니다.

놀라운 점은 화가가 상징을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위 작품은 66 x 62cm의 크기로 작은 편에 속하며, 작품을 오래도록 자세히 봐야지만 상징들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화의 발전은 미술에 이처럼 새로운 재미를 더했다.




"그냥 봐서는 진짜 모르겠네.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느낌이야."
아내가 말했다.


"그치?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은 논란도 되게 많은 편이야."

"왜?"

"상징들이 많다 보니 해석의 여지가 많거든. 마치 '시'처럼. 붓터치 하나하나에 화가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지."

"시인 같은 화가?"

"응. 궁정화가였던 화가 자신을 나태함으로, 의뢰인을 인색의 상징으로 표현한다는 것도 신선해. 의뢰인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숨겨놨나 싶기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긴 하다."

"기록이 많이 없는 게 아쉽지. 근데 사실 정말 논란이 많은 작품은 따로 있어."

"뭔데?"




<아르놀피니 부부의 약혼> 얀 반 에이크, 1434 (출처 en.wikipedia.org)


위 그림은 많은 비밀이 숨어있는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약혼.'

작품의 의뢰인은 브뤼헤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로 알려져 있다.

아르놀피니가 어떠한 의도로 작품을 의뢰했는지 살펴보자.


그림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의뢰인의 '부유함'이다.

일단, 두 남녀는 창 밖에 열매가 맺힐 정도로 따뜻한 날씨임에도 모피코트를 입고 있다.

무언가 중요한 순간에 앞서 두 등장인물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꾸며 입었다는 뜻이다.


모피코트 외에도 그들의 부유함을 엿볼 수 있는 상징들이 많이 있다.

창가 아래쪽 무심히 놓여있는 오렌지는 당시 굉장히 귀한 과일이었으며, 바닥의 카펫이나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 역시 당시 집 안에 있기 힘들었던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침실이 굉장히 사적인 공간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침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나타내는 공간이었다.


다음으로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현장에서 무언가 신성한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발이 바닥에 흩어져있고 맨발로 있다는 것은 신성한 공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샹들리에 위의 초는 일반적으로 신의 눈을 의미한다.

우리는 신의 가호 아래서 그들의 '약혼'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여인은 그녀의 오른손을 아르놀피니의 왼손에 얹었고 아르놀피니는 약혼의 표시로써 그의 오른손을 그녀의 손위에 올려놓으려고 하고 있다.

또한 표정에서 드러나는 엄숙한 분위기 또한 이곳이 약혼 현장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 거울이다.

거울 위에는 '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는 화가의 서명이 있는데, 얀 반 에이크는 최초로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넣은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마 화가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약혼을 그려달라고 요청받았을 것이다.

이에 화가는 서명을 통해 그가 이 신성한 약혼의 증인임을 나타냈다.


또한 거울을 자세히 보면 얀 반 에이크 옆에 한 사람이 더 보이는데,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화가의 조수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여기에도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추측은 지금 이 순간 저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그림의 '관람자'라는 해석이며, 덕분에 아르놀피니 부부는 가장 많은 하객을 가진 부부로 불리기도 한다.


'롤랭의 마돈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화가의 섬세함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섬세함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신뢰'를 상징하는 강아지이다.

이 작품 또한 68 x 82.2 cm 크기의 작은 그림이지만, 그는 말 그대로 강아지의 털을 한올 한올 표현했다.

더욱이 강아지의 눈에서는 빛의 방향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화가는 인간의 눈에 비친 빛에 따라 전체적인 그림자의 방향과 명암 또한 훌륭하게 표현했다.


작품 속 여러 개의 소실점 (출처 youtube.com/watch?v=9cBbWQrz2aY)


마지막으로 얀 반 에이크는 브루넬리스키와 마사초의 업적도 잊지 않았다.

바로 '원근법'이다.

특이한 점은 그가 수많은 상징들을 담기 위해 여러 개의 소실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화가는 바닥과 천장, 창문 등 모두 다른 각도에서 현장을 바라본 뒤, 모두 조합하여 하나의 화면에 담아냈다.


하나의 소실점 : 인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


이러한 접근은 당시로선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하나의 소실점을 가진다.

 이유'인간의 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의 소실점에 익숙하다.

얀 반 에이크의 시대, 즉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인간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그가 인간의 눈을 초월하고자 했을까?

얀 반 에이크는 피카소, 브라크보다 500년 앞서 입체파적인 발상을 했다.

게다가 여러 개의 소실점을 사용하면서도 언뜻 봐서는 어색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화롭게 작품을 그려냈다.

얀 반 에이크의 '천재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원근법은 다시 봐도 신기하다."
아내가 말했다.


"왜?"

"수학적 원리 안에서 이런 예술이 탄생한다는 게? "

"화가들이 머리가 아프긴 했을 거야."

"근데 이 작품에 무슨 논란이 많은 거야?"

"작품의 제목이 바뀔 수도 있거든."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처음에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이었어."

"그러게. 왜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그렸는지 궁금했어."

출처. youtube.com/watch?v=9cBbWQrz2aY

"그림이 그려진 게 1434년인데, 아르놀피니 부부가 1447년에 결혼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어 버렸거든."

"그래서 제목이 '아르놀피니 부부의 약혼'으로 바뀐 거야?"

"응. 근데 이상하지 않아? 약혼을 하고 13년이나 지나서 결혼을 한다는 게? 전쟁에 끌려간 것도 아니고 아주 부유했던 사람들이니까."

"음... 그러네."

"그렇게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2000년대에 와서 또 하나 알아낸 사실이 있어. 집안 사촌 중에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아르놀피니'가 있었다는 거야. 그림의 주인공이 원래 알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지."

"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문제는 또 다른 '아르놀피니'의 아내는 그림이 그려지기 1년 전... 그러니까 1433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렇다면 이 작품은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한 그림이라는 얘기가 돼. 그리고 이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왜?"

"얀 반 에이크가 뭘 숨겨놓았는지 다시 그림을 봐보자."


"샹들리에에 있는 하나의 초가 신의 눈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아내 쪽에도 희미하게 초가 있었다가 모두 타버린 흔적이 그려져 있거든. 이게 '아내의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


"또 하나의 증거는 거울에 있어. 거울 바깥편에 10개의 원형 장식들 보여?"

"응."

"자세히 보면 예수의 이야기를 그려놓은 거거든. 근데 아르놀피니 쪽에는 예수의 '삶'과 관련된 부분이 그려져 있고 아내 쪽에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그려져 있어."

"아하..."

"그리고 당시 여성의 무덤에 강아지 조각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데.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강아지도 여인 쪽을 향하고 있지."

"아...난 이미 설득된 거 같은데?"

"그럴 듯 하지? 이게 만약 사실로 밝혀지면 그림의 제목이 이전까지와는 180도 다르게 바뀔 거야."

"뭘로 바뀔까?"


엄숙해 보이기도, 슬퍼 보이기도한 아르놀피니 부부의 표정


얀 반 에이크라면... '아르놀피니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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