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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능 Jan 21. 2024

르네상스 : 재탄생(Renaissance)

관성의 전환


"십자군이 뭐였지?"
아내가 물었다.


<Entry of the Crusaders in Constantinople>, Eugene Delacroix (출처 en.wikipedia.org)


"아마 학창 시절에 배웠을 거야. 간단히 말하면 교황이 만든 '신의 군대'이지. 그림은 십자군이었던 프랑스군이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그린 거야."

"비잔틴 제국도 같은 기독교 아닌가? 왜 신의 군대가 여길 공격 했대?"

"비잔틴 제국이 돈을 안 갚았거든."

"무슨 돈?"

"비잔틴 제국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당시 황태자가 십자군들에게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어. 원래 십자군의 목적이 쿠데타 진압은 아니지만 큰돈을 준다고 하니 황태자의 요구를 들어준 거지."

"막상 진압하고 나니 돈을 안 준 거야?"

"그치. 사실 못 준거지. 황태자가 급해서 너무 큰 액수를 불렀거든."

"신의 군대가 돈 때문에 이런... 원래 십자군의 목적은 뭐야?"




11세기 이후 중세 유럽은 안정 속에서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특히 삼포제(3년에 걸친 순환재배 체제), 무거운 쟁기 등을 통해 농업이 발전했다.

이에 따라 인구도 증가했는데, 한정된 땅 안에서 노동력이 덜 필요하게 되자 노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규모 전쟁과 약탈을 일삼는 그들은 중세 봉건 영주들에게 골칫거리였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우르바노 2세 (출처 wikipedia.org)

이 무렵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위 그림의 클레르몽 회의에서 유명한 말을 했다.


"Deus vult."
"신께서 (전쟁을) 원하신다."


1095년의 일이었다.

교황은 이교도 이슬람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지역을 되찾으면 우리가 죄사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이러한 소식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그리고 영주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골칫거리였던 노는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 추가적인 영토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명분은 '구원'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백성들이 십자군 원정길에 올랐다.


"구원이 그렇게 중요한가?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내가 말했다.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에게 죄사함이라는 게 엄청난 거야."

"죄사함은 뭔데?"

"내 죄를 용서받는 거.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그냥 태어나면서 죄인이야. 이걸 '원죄'라고 해."

<The Fall and Expulsion from Garden of Eden>. 미켈란젤로, 1509 (출처 seniormaeil.com)

"자기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알지?"

"응. 들어봤지."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해 주는 선악과를 먹어버리잖아? 최초의 인간이 이러한 죄를 지음으로써 후대의 모든 인간도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게 교리거든."

"사과를 먹은 죗값이 엄청나네."

"유일신 하느님의 말을 거역했으니까. 어쨌든 클레르몽 회의 이후 소집된 1차 십자군들이 손쉽게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건국하게 돼. 얼마 못 가서 다시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세력에게 뺏기지만. 그리고 여덟 번에 걸쳐 십자군 전쟁을 하게 되지."

"아무리 구원이라도 여덟 번이나?"

"뭐 명분은 구원이긴 하지만... 아까 콘스탄티노플 함락한 거 봤지? 원정이 거듭될수록 십자군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거든. 그래서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교회의 권위가 쇠퇴하기 시작해."

"그 뒤에 르네상스 시대로 이어지는 거구나?"


"맞아. 전쟁이 끝날 무렵 르네상스의 개화를 알린 천재가 등장하거든."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났다.

피렌체의 시인 단테는 '신곡'에서 교황과 성직자들을 지옥으로 보내버렸으며, 흑사병까지 돌며 사람들은 종교적인 동요를 겪게 된다.

또,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영주의 성에서 나와 교통의 요지인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개화를 알린 천재, '조도 디 본도네'도 이러한 도시 중 하나였던 피렌체에 살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와 비슷하게 공화제를 시행했다.

권력의 주체는 시민이었으며 자연스레 사람들은 다시 신이 아닌 '인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왼쪽 <신앙>, 조토 디 본도네 (출처 it.wikipedia.org) / 오른쪽 <수태고지> 스바비아 복음서 필사본의 한 페이지 (출처 브런치@macather0998/17)


왼쪽의 작품은 조토가 그린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즉 벽화이다.

조토는 이전 천년 동안에 볼 수 없었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인간의 시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오른쪽의 이콘화에 비해 입체감이 도드라지는데, 조토가 깊이감을 위해 이용한 것은 조각이다.

당시 사람의 눈을 가장 잘 재현했던 예술이 조각이었기 때문에 등장인물을 조각과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의 변화로 인해 전달 방식도 달라졌다.

오른쪽의 이콘화가 성경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전달했다면, 조토는 눈앞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스도를 애도함>, 조도 디 본도네, 1306 (출처 wikiart.org/en/giotto)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마지막으로 포옹하며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다.

조토에게 회화는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가 몰두했던 것은 한 가지였다.

'이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보였을까?'


이에 따라 중세 시대에 없던 배경이 등장했다.

파란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 조토는 인간의 눈을 통해 본 물리적 공간을 담아냈다.

또한, 중세 시대의 이콘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생생한 표정도 살아났다.

마리아도, 천사도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으며, 목격자의 시선으로부터 등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애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토는 르네상스의 개화를 알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미술가들의 이름을 후세에 알려지도록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콘화는 사실상 일종의 매뉴얼과 훈련에 따라 그려진 종교적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토의 그림을 본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조토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로써 완전히 잊혀졌던 미술가들의 이름들이 다시 기억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현상이었다.




"화가의 이름이 남겨지기 시작했다는 부분이 재밌네."
아내가 말했다.


"그치? 사실 화가라는 직업이 역사적으로 큰 명성을 가지지는 않았어. 우리에게 익숙한 거장들도 대부분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화가들이지."

"그렇구나."

"심하게 말하면 중세 시대의 화가들은 당시 사람들에겐 '제조업 종사자'와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거야. 작품에 서명을 하지도 않았지."

"제품을 찍어내듯이 그림을 그린 건가?"

"응. 자기는 '화가'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뭐야?"

"글쎄... 인간 카메라 같은 느낌이랄까?"

"큰 의미로 본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모습으로 캔버스에 담는 일이잖아?"

"응."

"중세 시대 화가들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보면 돼. 캔버스를 들고나가서 무언가를 그려보고 할 일이 없었으니까."

"아 그런 거구나."

"응. 조토가 등장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화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해. 표현기법도 엄청 발전하지."

"뭐가 생겼는데?"

"일단 시작은... 원근법."



피렌체 대성당 앞에 한 유망한 건축가가 서있다.

무언가 이상한 실험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

원근법의 창시자, 브루넬레스키다.


한 손에는 거울을, 한 손에는 그림을 들고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그의 실험은 이러했다.


원근법 논증 과정 (출처 blog.naver.com/mou1won)


먼저 그는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을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렸다.

그리고 위와 같이 이 그림에 구멍을 뚫고 그림 뒷면의 구멍을 눈앞에 위치시킨다.

그 앞에 거울을 놓는다.

이어서 거울과 그림을 움직여가며 '실제의 세례당'과 '거울에 비친 그림의 세례당'이 완전히 포개지는지 본다.


브루넬레스키 실험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G2BCdA23Kpg)

위 영상을 통해 그가 했던 실험이 무엇을 위한 실험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이처럼 하나의 소실점으로부터 원근감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수학적 원리'를 찾아냈다.

이는 그리스,로마 시대 고전주의 대가들도 찾지 못했던 혁명이었으며, 브루넬레스키의 발견은 이후 수백 년간 미술을 지배했다.



"미술사에도 수학적 실험이 있었다니... 놀랍네."
아내가 말했다.


"신기하지?"

"응."

"사실 브루넬레스키는 건물 구조나 돔의 모양을 더 현실적으로 만들고자 원근법을 활용한 사람이야. 그림에 원근법을 적용한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은 따로 있지."

"누구?"


"마사초."



마사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기에는 '조토'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작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피렌체에 온 것은 22살.

그곳에서 브루넬레스키를 만나 '원근법'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조토가 남긴 유산에 원근법을 접목해 대작인 <성전세>, <성삼위일체>을 남겼다.


<성전세>, 마사초, 1426 (출처 en.wikipedia.org)


위 그림은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려진 프레스코이다.

그림의 중앙에 뒤돌아있는 있는 세금 징수원이 예수에게 성전세를 요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의 손 끝을 따라가 보면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은 뒤 입 속에서 동전을 꺼내는 장면이 보이고, 그다음 오른편에 세금을 내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도 화가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기독교의 권위가 떨어지긴 했지만, 세상을 집어삼켰던 기독교의 포용성에는 '관성'이 있었던 것이다.


눈여겨볼 점은 단연 '원근법'이다.

예수의 머리를 소실점으로 완벽하게 원근법 구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배경의 산등성이를 살펴보면 실제 눈으로 보았을 때와 같이 그가 더 멀리 있는 것을 더 희미하게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마사초가 선원근법뿐만 아니라 공기원근법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삼위일체>, 마사초, 1426~1428 (출처 mr-yeom.tistory.com)


이 작품은 마사초의 작품 중 제일 유명한 <성삼위일체>이다.

그림 중앙에는 앉아있는 하느님(성부)과 십자가의 예수(성자), 그리고 비둘기로 상징화된 성령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림의 주제인 <성삼위일체>를 뜻한다.

십자가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서있고, 성모 마리아는 관람자가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손짓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표현 기법을 통해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기가 같은 둥근 아치는 소실점에 따라 그려진 선들에 의해 정확한 비율로 축소되어 그려져 있다.

당시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벽에 구멍이 뚫려있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재단의 아래에 해골과 함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나는 한때 당신이었고, 당신도 결국 내가 될 것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이 글귀는 작품의 종교, 철학적인 의미를 더했다.

실제로 마사초는 이 작품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28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대해 잊지 않고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었다.

그렇게 그의 작품만이 남은 채 16세기로 들어서면서 르네상스는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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