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도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아내가 말했다.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 (출처 fr.wikipedia.org)
"어떤 그림?"
"기독교를 주제로 하는 그림. 난 모나리자 밖에 몰라서 다빈치가 초상화나 풍경화를 많이 그린 줄 알았네."
"아...사실 다빈치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대의 화가들이 기독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긴 했지."
"그러니까. 언뜻 둘러봐도 엄청 많은 것 같아. 왜 이렇게 성모나 예수 그림이 많은 거야?"
"그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봐야지. 기독교의 역사가 곧 세계사거든."
"기독교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는데?"
아내가 물었다.
시끄러운 군중들 사이, 로마의 군인과 한 남자가 있다.
군인의 이름은 '폰티우스 필라투스'.
군인은 한 남자를 심문하고 있다.
"그대가 유대인의 왕인가?"
군인이 물었다.
"..."
남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군중 속 몇몇 유대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저자는 로마에 세금을 내선 안 된다고 선동한 자요!"
"저자는 패거리를 지어 무장봉기를 꾀하는 자요!"
"그대는 저 사람들이 고발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군인이 다시 물었다.
남자는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군인은 이상했다.
남자의 모습이 반역자나 선동자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듯한 인상이었다.
군인이 남자의 '무죄'를 공표하자 유대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에 로마 병사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눈빛엔 살기와 광기가 가득했다.
다급해진 군인은 부하에게 물을 떠 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이 남자의 피에는 책임이 없으니, 그 책임은 온전히 그대들이 져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이 자를 십자가형에 처하라."
<이 사람을 보라> 안토니오 시세리 (출처 ko.wikipedia.org)
"기독교가 탄생한 게 로마 제국 시절이었구나."
아내가 말했다.
"응.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모두 로마 시절의 이야기야."
"근데 유대인이랑은 무슨 상관이야? 예수를 처형받게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왼쪽부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상징 (출처.hankookilbo.com)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까지 더해서 같은 뿌리라고 볼 수 있어. 이름을 다르게 부르긴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거지."
"이슬람교까지?"
"응.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대교의 유일신 개념을 이어받은 거야.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생겨날 때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 유대인 입장에서 '메시아'라 불리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거지."
"유대교는 언제부터 있었는데?"
"음... 자기도 아담과 하와, 노아의 방주, 모세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들어봤지?"
"들어봤지."
"그게 구약 성경의 내용인데 구약이 원래 유대교의 경전이라고 보면 돼."
"그게 유대교였구나..."
"모세의 기적이 '출애굽기'라는 구약에 나오는데 '이집트 탈출기'라는 뜻이거든. 고대 이집트 때에도 유대교가 있었다는 얘기지."
"아... 오랜 전통의 '유대교'와 로마 시대에 새로이 나타난 예수의 '기독교'가 충돌했다는 거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왜 기독교만 널리 퍼진 거야? 그림도 예수나 성모 마리아는 많은 것 같은데 모세의 기적이나 노아의 방주 그림은 루브르에서 못 본 것 같아. 그리고 주위에 기독교인은 많이 봤어도... 우리나라에 유대교가 있나?"
"음... 자기는 유대인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올라?"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유대인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만 꼽자면 '선민사상'일 것이다.
즉, 유대인만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선민사상은 독특하고 엄격한 종교적 법과 의식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탁월하게 작용했다.
이집트 파라오가 자신을 '신'으로 칭했던 시절에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던 시절에도, 유대인들은 이들을 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덕분에 끝없는 핍박과 미움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은 이 또한 선택받은 민족의 필연적 운명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절대적 신앙'은 계속해서 대를 이어갔으며 유대인들은 그 어떤 살아있는 권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을 읽고 있는 벤 구리온 (출처 jpost.com/israel-news)
결국,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일찍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2,700년 후 지금의 이스라엘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유대교의 선민사상과는 달리, 기독교는 '보편성'과 '포용성'의 특징을 지닌다.
예수의 가르침은 인종이나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접한 문화의 요소들에 적응하고 통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와 달리 강한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벨라스케스, 1632 (출처 en.wikipedia.org)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만의 독특한 요소를 더했으며 짙은 호소력을 갖게 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아주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특징적 차이 때문이었을까.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잠재위험'을 바라보는 통치자의 시각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로마 제국 시절, 유대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네로 황제는 1,2차 유대 전쟁을 통해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유대인들이 도망간 곳이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예루살렘 성전이다.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Jerusalem>, Francesco Hayez, 1867 (출처 en.wikipedia.org)
당시 예루살렘 성벽을 부시던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이 사실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며 성벽의 일부를 남겨놓았는데, 이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성지가 되었다.
또, 이후 황제가 된 티투스가 유대인 포로의 강제 노역을 통해 '콜로세움'을 만든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끊임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대를 이어왔다.
물론, 기독교도 초기 300년 간 로마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의 거대한 흐름은 끝내 제국의 황제들을 압도했다.
'보편성'과 '포용성'의 힘에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들은 이에 전세를 뒤집을 묘수를 두게 된다.
기독교를 통치 수단으로써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밀라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주고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것은 이미 너무 많아진 기독교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며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프리드리히 카울바흐, 1861 (출처 en.wikipedia.org)
이로부터 약 100년 뒤 서로마를 멸망시킨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는 왕위의 정통성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으며, 그 이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해 교황의 대관식을 통한 일종의 승인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아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난징 조약을 체결하면서 빠뜨리지 않았던 조항이 바로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한 순간에 식민 지배를 받게 되거나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백성들의 분노와 불안을 기독교의 '포용성'이 녹여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아까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에서도 성직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내가 말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1806) (출처 Collections.louvre.fr)
"맞아. 루브르 박물관에 있지. 대관식 자체가 교황이 왕권을 정식으로 공표하는 행사야. 이 그림에서는 성직자들이 들러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 사실 얼마 전에도 대관식이 있었는데 기억나?"
"지금도 있다고?"
"얼마 전에 영국 찰스 3세의 대관식이 있었어."
"기억난다.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는 걸 본 것 같아. 정말 기독교의 역사가 곧 세계사네."
"그치? 당연하게도 미술사에도 기독교의 색채가 그대로 나타나게 돼."
"어떻게?"
"기독교가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키면서
미술사에도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펼쳐지게 되거든."
<Constantine’s Dream>, Piero della Francesca (출처 historytoday.com)
전쟁을 앞둔 황제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
쏟아지는 별빛,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황제를 지키는 병사의 숨소리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말했다.
"이 십자가 밑에서 당신은 승리할 것이다"
천사가 말했다.
황제가 천사를 붙잡으려는 찰나,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정말로 전투에 승리하게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기독교 박해가 끝나자 기독교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단 말 그대로 '교회'가 필요했다.
더 이상 카타콤과 같은 묘지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밖으로 나온 기독교인들에 눈에 띈 것은 당시의 신전들이었다.
하지만 신전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구조적으로 적합하지 않았고, 개종한 신도들이 신전을 사용함으로써 종교적 혼란을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4세기 건축된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를 재구성한 도판 (출처 kbmaeil.com)
그리하여, '바실리카'라는 이름의 커다란 강당 형태의 교회가 생겨났다.
바실리카는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어 재판을 하거나 시장이 열리기도 했던 건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고, 시선이 집중되는 건물 구조여서 재단을 배치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실리카의 내부를 어떻게 장식할 건지에 대한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대리석 흉상,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출처 imperiumromanum.pl ) 당시 성직자들의 눈에 위와 같은 고전주의 조각상들은 성경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우상화된 형상'이었으며, 헬레니즘을 계승했던 로마의 인간 중심적이고 역동적인 회화 작품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또, 글을 읽거나 쓸 수 없는 신도들도 많았었기에 그들을 교화시킬 방안이 필요했다.
성직자들이 고민 끝에 화가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새로운 디자인을 가져오세요.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말했다.
아마 당시 성직자들은 화가들에게 아래의 조건을 요구했을 것이다.
- 바실리카 회화 작품 제작 요구 사항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시킬 수 있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전달할 것
#주의를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지 말고 이야기에 집중시킬 것
#어린아이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 명확할 것
#절대로 이전의 이교도의 예술이 떠오르지 않게 할 것
이윽고, '이콘화'가 탄생했다.
<The Miracle of the Loaves and the Fishes> (출처 christianiconography.info) 위 그림은 라벤나 지역의 바실리카에서 나온 모자이크화이다.
성직자의 요구사항에 알맞은 그림이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위 그림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먼저, 화가들은 표정이나 자세, 색채 등 주의를 끌만한 요소들을 삭제시킴으로써 등장인물에 성스러운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인물보다는 오직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누가 보더라도 가운데 인물이 예수라는 것을 알아차릴 테고, 빵과 물고기를 주는 장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한눈에 보더라도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어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 준다.
'이콘화'는 이러한 종교적 상징물을 뜻한다.
화가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기독교의 신비로움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 즉 성스러운 상징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수태고지>, 카탈루냐 국립미술관 (출처 en.m.wikipedia.org)
위 그림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께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을 담았다.
마찬가지로 두 등장인물은 인간을 초월한 듯한 영적인 인상을 주도록 표현되었으며, 이야기 자체만을 담고 있다.
이콘화에 이르러, 고전주의로부터 헬레니즘 시대로 이어져왔던 인간 중심의 사고관은 사라졌다.
(헬레니즘 미술 : https://brunch.co.kr/@bb02810c2cd7432/6 )
이집트 미술에서처럼 중세에 이르러 모든 것은 중심은 '신'이었다.
이집트의 화가들이 그들만의 절대 법칙을 배워가며 양성되었듯, 중세 미술 또한 엄격한 조건과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집트 미술 : https://brunch.co.kr/@bb02810c2cd7432/5 )
자연스레 이콘화는 여러 예술가가 모여 하나의 작품을 공동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락시텔레스'와 같은 고전주의의 조각가들이 후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콘화에서는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성이 사라지자, 예술가의 이름도 사라졌다.
그렇게 암흑시대라 불리는 중세 미술은 약 1,000년간 이어졌다.
"왜 암흑시대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아내가 말했다.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응.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드는 느낌인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술계가 중세에 와서 퇴보했다고는 볼 수 없어. 사실 철저히 의도된 거라고 봐야지."
"시대를 반영한 것뿐이다?"
"응. 사실 이질적인 느낌도 현재의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이제 막 종교의 자유를 얻은 기쁨에 취해있던 중세 시대 사람 입장에서는 이콘화야 말로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거든."
"그럴 수가... 있나?"
"그때로 돌아간다고 상상해 보면... 여기저기서 듣기만 했던 이야기들이 바실리카 이곳저곳에 그려진 걸 보면서 모든 것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
"맞아.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사람들의 믿음이 생겼다는 게 아닐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