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능 Feb 18. 2024

"여기에 무엇을 더 한단 말인가?"

변화의 바람을 마주한 세계

16세기 이르러 예술가들의 지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것이 마냥 좋기 만한 일은 아니었다.

바톤을 이어받은 후배 예술가들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선배 거장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했다.


후배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선배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분석할수록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대체 여기에 무엇을 더 한단 말인가?"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조화와 균형미'에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미술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의 형상을 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욱여넣었다.

이에 따라 우람한 운동선수들의 나체가 가득한 종교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와 같이 선배들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던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이라 불렀다.


"매너리즘이 미술사에서 나온 단어구나."
아내가 말했다.


"응. 아마 미술사에 등장하는 미술 사조이름이 현재까지 쓰이는 건 매너리즘 밖에 없을 거야."

"이해는 간다. 선배가 너무 뛰어났으니 후배 화가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긴 해."

"그치? 당시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고뇌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아."

"어떤 고뇌?"




<폭풍우> 조르조네, 1508 (출처 wikipedia.org)


이 작품은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화가 조르조네의 작품이다.

여기서 피렌체 거장들의 작품을 떠올려본다면, 위 작품이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인물이 세심히 그려진 것도 아니며 교묘한 구도나 원근법이 적용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조르조네가 이를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어떤 고민을 했던 것일까.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풍경'이다.

이전까지의 화가들은 당연하게도 주요 인물과 이야기를 그림의 중심부에 표현했다.

이를 둘러싼 풍경은 주제가 되는 법이 없었으며, 부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조르조네는 풍경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두 등장인물은 그림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으며, 작품의 중앙에는 마을의 풍경과 폭풍우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조르조네는 선배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사물과 인물을 캔버스 위에 논리적이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 자연과 인간, 이를 둘러싼 공기와 빛, 구름 등을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


<거룩한 밤> 안토니오 다 코레조, 1530 (출처 en.wikipedia.org)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인 파르마에서 활동했던 안토니오 다 코레조의 작품이다.

작품은 갓 태어난 아기 예수로부터 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가장 환하게 빛나며 행복감을 드러내고 있고, 목동은 무릎을 꿇고 경배할 준비를 하고 있다.


코레조는 '빛'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물들의 배치를 살펴보자.

작품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하늘 위 천사들, 그리고 목동과 하녀들이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불안정한 배치구조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가는 선배들의 균형미를 더욱 발전시키는 대신 균형을 틀어버렸다.

그런 다음 빛을 통해 얼마든지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가는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짐으로써 전체적인 균형을 잡았고 주제를 더욱 부각하는 효과까지 얻어냈다.

덕분에 강렬하게 빛나는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단번에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이 긴 성모> 파르미자니노, 1534-40 (출처 en.wikipedia.org)


이 작품은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이다.

그의 고뇌가 너무 깊었던 탓일까.

화가는 기나긴 여정 끝에 길을 잃어버렸다.

인물들의 배치는 불완전하며, 우측 하단에 작게 표현된 예언자는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다소 어색한 원근감을 준다.

특히, 성모의 목과 손가락은 과도하게 길고 아기 예수의 몸도 아기라고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기괴해 보인다.


물론 파르미자니노가 제대로 그릴 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위와 같은 왜곡된 표현 방식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 이러한 과장된 신체를 알아차리는 순간 발생한다.

관람자의 시선이 '부조화'에 고정되며 전체적인 주제와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왜 그토록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는가?

파르미자니노는 매너리즘이 가진 결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이다.


왼쪽 <방문>, 오른쪽 <옮겨지는 그리스도> 자코포 폰토르모, 1528 (출처 en.wikipedia.org)


위 작품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자코포 폰토르모의 작품이다.

왼쪽 작품 <방문>은 성모 마리아와 사촌 엘리자베스가 만나 잉태의 사실을 알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폰토르모는 마치 현대 미술에서나 볼 법한 파격적인 색상을 사용했다.

그가 원근법 또한 무시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건물과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성모 마리아와 사촌이 마치 거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작품 <옮겨지는 그리스도>도 살펴보자.

전기 작가 바사리는 작품에 대해 "경악, 그 자체였다."라고 전한다.

화가는 예수의 몸이 거의 초록색으로 보일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색채를 사용했다.

원근법과 구도 역시 불안정하며, 중력마저 무시하듯 인물들은 하늘 위를 떠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엘 그레코, 1614 (출처 brunch.co.kr/@jungheehan/17)


반대로 어두움으로 가득 찬 색채의 작품도 있다.

화가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 미술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눈으로 본모습과는 거리가 먼 엄숙한 양식의 성상들을 보며 자라왔다.

이후 베네치아로 건너온 그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은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이다.

가장 왼쪽의 성 요한은 두 팔을 벌리고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달라며 하늘에 부르짖고 있다.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의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엘 그레코는 선배 거장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작품에는 도저히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비이상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가 의도한 것이 무엇일까.

엘 그레코는 선배들의 '조화와 균형미'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만들고자 했다.

먼발치에서 '조화와 균형미' 감상하는 대신, 관람자는 그의 실감 나는 표현에 사로잡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뭔가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것 같다"
아내가 말했다.


"그치? 인본주의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졌던 르네상스와는 많이 다르지."

"같은 시대의 작품들이라고 하기엔 조금 정신없는 것 같기도 해."

"나도 그런 것 같아. 재미있는 건 현대에 와서 매너리즘이 재평가되기도 했다는 거야."

"어떤 식으로?"

"현대 미술가들과 닮은 점이 있거든. 현대 미술도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처럼 '분명한 것을 피하고 자연스러움과는 다른 차별화된 시각적 효과'를 보이고자 한다는 거지."

"아... 비슷한 고민거리가 있는 거구나."

"응. 그렇지만 상황은 매너리즘 시대가 좀 더 혼란스러웠을 거야."

"왜?"

"그 당시 큰 사건이 일어나거든."

"어떤 사건?"

"자긴 16세기 유럽 하면 떠오르는 게 뭐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지동설도 이 시기에 맞물려 있어. 근데 지동설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어. 교회는 물론이고 천문학자들조차 반대했었으니까."

"하긴 갈릴레오랑 케플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증명된 건 아니니까. 그럼 뭐지?"


"자기도 학교 다닐 때 들어봤을 거야. 면죄부."



교회가 '면죄부'를 처음 팔기 시작한 건 11세기부터였다.

바로 십자군 전쟁의 시기이다.

교황은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교회는 면죄부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십자군의 규모가 너무 커져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전쟁 자금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이에 교황은 전쟁 자금을 보탠 사람들에게도 죄의 벌을 면제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교회의 '면죄부'와 '돈'이 결합되기 시작했다.

 

면죄부 (출처 breaknews.com/496107)


우리는 이 '면죄부'의 결말을 잘 알고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이 도화선이 되어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사실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비판의 목소리는 많았다.

존 위클리프, 얀 후스와 같은 신학자가 14세기부터 교회의 부패를 비난했으나, 결국 파문을 당하거나 무덤이 파헤쳐지는 불명예를 겪었다.

그렇다면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서야 개혁이 본격화된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개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던 한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구텐베르크'이다.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을 발명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발명한 기술이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1448년 인쇄소를 개업한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면죄부를 찍어내며 부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인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뒤, 인쇄술을 통해 번역본을 대량으로 생산해 퍼져나가게 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던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반인도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내면의 성찰을 통해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면 교황과 대주교와 같은 종교권력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 탄생 이후 1,500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거대한 관성에 스크래치가 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흔적 또한 미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텐베르크 제단화> 루카스 크라나흐, 1547 (출처 christiantoday.co.kr/news/352998)


이 그림은 개혁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제단화이다.

크라나흐는 마르틴 루터와 두터운 친분이 있던 화가였으며, 개혁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대변하듯 제단화에는 루터교에서 인정하는 세 가지 성사인 세례, 성찬, 사죄가 묘사되고 있다.



눈 여겨볼 부분은 제단화 중앙의 그림이다.

크라나흐는 제단화 중앙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왼쪽의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요한, 예수의 왼쪽에 비장한 모습의 베드로, 예수의 오른쪽에 은화 주머니를 가진 유다의 모습 등이 보인다.


이 작품에는 개혁의 주역인 '마르턴 루터'가 등장한다.

루터는 그림의 오른편에 검은색 망토를 입고 있으며, 청년에게 가득 찬 포도주 잔을 넘겨주고 있다.

이러한 루터의 행동에서 개혁의 정신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일반 신자에게는 성찬 때 제병을 주는 것조차 위험하게 생각했던 교회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몸과 피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루터의 왼편에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출판한 인쇄업자 '한스 루프트'도 그려져 있다.

개혁 과정에서 인쇄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 소 한스 홀바인, 1521 (en.wikipedia.org)


당시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종교 개혁에 매료되었던 한스 홀바인의 작품이다.

그림을 본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극단적 사실주의'에 있다.

실제로 홀바인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실제 익사한 시체를 관찰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이토록 절망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작품 속 예수의 시신은 "성경의 내용처럼 예수가 부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믿음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이 그림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네 명의 사도들> 알브레히트 뒤러, 1526 (출처 en.wikipedia.org)


위 그림은 종교 개혁의 근원지였던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이다.

왼쪽 패널에서는 주황색 옷을 입은 요한과 그 뒤의 베드로, 오른쪽 패널에서는 흰 옷의 바울과 마가가 묘사되어 있다.

뒤러 또한 루터를 지지했던 화가였으며, 그는 작품 속에 온전한 개혁의 정신을 담아냈다.


먼저, 요한과 베드로의 묘사 방식이 달라졌다.

그전까지의 종교화 들은 베드로를 중심에 내세웠지만, 뒤러는 요한을 전면에 배치시켰다.

루터가 복음서 중 특히 요한복음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요한을 젊고 강단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개혁의 핵심이었던 '독일어 성경'을 들고 있다.

반면, 그 뒤의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는 늙고 침울하게 그려졌다.

그저 땅을 바라보며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베드로는 마치 숙명과도 같은 종교 개혁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듯한 모습이다.


오른쪽 패널에서는 바울과 마가가 등장하는데 이들 또한 모두 강렬한 인상을 하고 있으며 성경을 들고 있다.

사실 마가는 엄밀히 말해 사도는 아니지만, 뒤러는 <네 명의 사도들>이라는 제목을 통해 마가를 사도로 인정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마가가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는 그만큼 복음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뒤러는 베드로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줌으로써, 다시 한번 성경을 강조하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루터가 철저한 성경 원리주의자였기 때문에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던 코페르니쿠스의 대척점에 서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당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강력히 비난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 자신조차 가톨릭 사제였기 때문에 그가 발견한 사실이 어쩌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책의 서문에 지동설의 개념이 반드시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내비치기도 했고, 직접 책을 출간하지도 않았다.

그는 생을 마감할 즈음 제자에게 <Revolutionibus>, 즉 '회전'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넘겨주며 출간을 부탁했었다.

결국, 그가 사망하던 해인 1543년에 그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가 발견했던 '회전(Revolutionibus)'은 현재에 이르러 '혁명(Revolutionibus)'이 되었다.



 

이처럼 세계는 변화의 바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고 다양한 분파가 생겨났으며 신앙은 개인화되었다.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개인적으로 신앙을 이해하며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세계의 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어 대항해시대, 제국주의의 시대가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유럽인들의 관심은 비단 지구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 행성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뒤 '지동설'을 완성시켰다.

이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종교적 사상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만든 지구가 그저 태양을 공전하는 여러 행성 중 하나일 뿐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어땠을까?

물론, 그들은 잠시 매너리즘에 빠져지냈다.

그들은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르네상스'를 넘어서고자 애썼다.

하지만 선배 거장들의 작품에서 빈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형태를 왜곡하기도, 어떤 이는 독특한 색채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잠시 뿐이었다.


예술가들도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세상은 폭풍우 속 돛단배와 같았다.

종교를 둘러싼 분쟁과 갈등, 식민지 개척 경쟁, 과학의 발달 하루하루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화했다.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조화와 균형미'가 어느새 낡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미술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전 10화 천재가 남긴 미완성의 수수께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