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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Aug 04. 2024

친구의 뒤통수를 후렸다

근원에 대하여-우정

 나는 거제도에서 자랐다. 8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래서 고향이란 글자를 보면 거제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곳에 있을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일순간 온기가 느껴진다. 내가 거제도에서 왔다고 말하는 순간 서울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통통배를 타고, 여름 하굣길에는 인적 드문 해수욕장에서 웃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구릿빛 피부를 번쩍이며 바다에 풍덩 다이빙하는, 그런 어촌마을의 풍경이 자동재생되는 듯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거제도는 큰 조선소가 두 개 있어, 꽤 오래전부터 도시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나름 공업도시인지라 그다지 가난한 집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재력이 뛰어난 집도 몇 없어 빈부격차에 대한 고민 없이 자라날 수 있는 곳이었다. 모아둔 재산도 없고 경제에 밝은 편이 아니었던 부모가 그곳에서 생활한 것은 우리 형제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맞벌이 집안이던 우리 집엔 형 친구들이 자연스레 왕래했다. 골목대장이던 형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은 나를 보며 “니가 고생이 많다.”라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내 또래보다 성숙한 그들의 대홧거리나 장난에 끼는 것은 무척 재밌었다. 당시 두 학년 차이는 큰 것이었기에, 그들과 어울리고 나서 내 친구들 틈에 끼면 나만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형 친구들의 끈끈한 우정은 내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자주 모여 등산을 가기도 하고, 조부모상 소식에 한달음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그들의 우정이 무척이나 견고해 보였다. 그들을 보며 친구란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접한 친구들이 그네들처럼 끈끈하진 않을지언정, 그래도 소중한 친우들이 몇 있다. 그리고 그들을 제법 소중하게 여기게 된 민망한 이야기도 하나 있다.


 지금 나의 키는 177 정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편이다. 그러나 성장이 더딘 편이었던 중고등학교 때엔 작은 키가 늘 콤플렉스였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나는 남들에게 무시받지 않으려고 인상도 쓰고 다니고, 걸음걸이도 껄렁대며 걷곤 했다. 물론 그게 먹혀든 적은 없었고, 주위로부터 ‘나댄다’는 소리나 들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연스레 친해진 그룹이 있었다. 활달한 성격에 수업도 열심히 듣는, 바람직한 친구들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학교를 마치고 당구를 치러 가자고 하였다. 나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문제는 학교가 끝나갈 때쯤 생겼다.

 당시 내 옆자리는 아는 형 누나가 많은, 소위 말하는 좀 ‘나가는’ 친구였는데, 학교 마치고 애들끼리 놀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 무리는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는, 공부에는 전혀 뜻 없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선약이 있으니 안된다고 말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데,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그들과 친해져 학교 생활에서 무시도 덜 받고, 어깨도 좀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애석하게도 굳이 잡아둔 선약을 깨면서까지 나는 ‘노는 무리’와 동행하였다.

 앞서 거제를 도시라고 소개는 하였지만, 지방이 으레 그렇듯 놀 만한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가주세요.”하면 데려다주는 곳이 고현동이었다. 그렇다 보니 필연적인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선약을 하였던 그 그룹과 마주치지 않길 바라면서 노는 무리와 동행하던 나는 당구장엘 가게 되었다. 그래도 당구장이 여러 군데 있으니 맞닥뜨리기야 하겠냐는 생각으로 들어간 당구장에서, 먼저 도착해 즐기고 있던 그 친구들을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현재 함께 있는 이 무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저 랩 잘하는 녀석.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가 없는 타이밍을 랩으로 채워줄 녀석. 사실 놀아보니 즐겁지 않았다고, 너희와 함께 노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집에 일 있다고 하지 않았나?”라며 눈썹이 한껏 올라가 묻는 친구들에게 대답을 얼버무리고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판사판. 애써 멀쩡한 척하며 당구에 열중하기 시작한 나의 등 뒤로 평소 바른말만 하던 P군의 들으라는 듯한 한마디. “졸라 싸가지 없네.” 일순간 등이 죄책감으로 전율했다. 이후 순하디 순한 그들은 나에게 무안함을 주지 않으려는 듯 신나게 놀고 돌아갔지만, 그것이 나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나는 그들을 한 명씩 찾아가 옆자리에 앉아 사과를 하였다. 그 뚜렷한 목적 없는 비행과 친구들을 급으로 나눈 저열함을 그들은 용서해 주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같이 있음으로써 즐거워지는 친우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사과가 받아들여짐으로써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의 야비한 행동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안다. 실상 나의 구원은 그들을 맞닥뜨린 당구장이었다. 잘못된 일인 줄을 알면서도 선약을 파기하고, 잘못된 일인 줄을 알면서도 노는 무리와 어울렸던 나는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무리에 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느껴야만 했던 부끄러움은 그것을 겪지 않았을 때 불러올 후회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체벌이었으리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의 전화를 한 번에 받는 일이 좀처럼 없다. 물론 내가 그들의 목소리를 필요로 할 때에도 마찬가지. 그러나 섭섭함은 들지 않는다. 무언가 일이 있겠지, 휴일이니 쉬고 싶겠지, 나중에 연락을 주겠지. 그들도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면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서로의 바쁜 생활을 이해할 만큼 머리가 자란 것일 수도 있고, 정말로 필요할 때면 형의 친구들이 그러하듯이 한달음에 달려와 줄 것을 믿기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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