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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Sep 08. 2024

참기름 전차 조종수

 전차는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132호 전차는 서서히 오른쪽으로 가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조종간을 주기적으로 왼쪽으로 꺾어 방향을 틀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것이 귀찮으면서도 한편으론 익숙해져 메트로놈이 일정하게 좌우로 까딱거리는 것처럼  당연한 현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길가에는 지면패랭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앞서 지나간 전차의 궤도자국 아래로 짓이겨진 잔디패랭이가 보였다. 나는 차도로 고개를 내민 그 꽃대를 밟지 않으려 중앙선을 넘어 조종했다.

 컨보이가 속도를 줄였는지 전봇대 두 개 간격을 두고 가던 전차 사이가 하나 정도로 가까워졌다. 도로로부터 우측 대각 방향으로 수풀이 우거져있고, 그 사이로 전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소로가 나있었다. 부대는 그곳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소로는 경사진 오르막이었고, 수풀에 봄볕이 차단되어 안개처럼 한기가 자욱했다. 바깥은 봄이 만연한데, 이곳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가벼운 전투복을 뚫은 한기가 내 몸을 감쌌다. 수풀 바깥과는 전연 다른 세상이었다. 궤도가 지나는 길가에는 켜켜이 쌓인 눈 틈새로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쑥갓두부무침 같은 그 광경을 보며 얼른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꼬박 이틀이 각종 마일즈 장비를 장착하느라 소모되었다. 전차를 세워둔 야지는 낮이면 눈 녹은 물로 온통 진흙탕이 되었다. 밤이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며 진흙을 꽁꽁 얼려놓았고, 다음날 햇살이 다시 진흙탕으로 녹이는 순환의 터였다. 이런 방식으로 봄의 진격을 늦추고 있는 곳이었다. 늪지대 같은 그곳에서는 걷는 것조차 힘든 일이었다. 전차에 오를 때마다 군화에 묻은 진흙을 탈탈 털어내었음에도 조종수석과 포탑에는 범인의 족적 같은 진흙이 지저분하게 남았다.

 훈련에 나오기 전 우리는 PX에서 야심 찬 소비를 하였다. 바로 참기름이었다. 훈련 중에는 손이 더러워지기 마련이고, 그 손으로 밥을 떠먹는 것은 삼겹살을 넣어 만든 제육볶음이라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 식관비닐에 밥, 반찬을 담고 맛다시 등을 섞은 후 구멍을 내어 짜 먹기 마련인데, 그때 참기름을 둘러주면 고기반찬이 없더라도 군침을 흘릴만한 음식이 된다. 첫째 날, 전차장이 참기름 공수 작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둘째 날, 후임 P일병이 참기름을 꺼내다 포탑 경사면에 떨어뜨렸고, 에스티로더색상의 우아한 유리병에 든 액체는 전차에 맛깔나게 도포되었다.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는 훈련이 끝나고 막사로 복귀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했다. 참기름을 병째 깨뜨리면 그 향이 코를 넘어 뇌까지 찌른다는 사실은 132호 승무원만이 알 것이다.


 훈련이 시작되고 전차는 중대단위, 소대단위로 찢어져 담당구역에 배치되었다. 우리 전차는 어느 풀숲에서 고지를 감시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생방 대응 최고 단계인 MOPP4가 발동되었다. 적군의 포병이 화학탄을 날린 것이다. 무겁고 갑갑한 화생방복과 장화, 방독면, 끝으로 장갑까지 착용했다. 전차에는 4명이 탑승하는데,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포탑에 3명이, 몸통 부분에 해당하는 차체에는 조종수 1명만이 탑승한다. 나는 조종수석에서 오롯이 혼자였다. 송수화구를 통해 포탑의 승무원과 대화할 수 있지만, MOPP4단계가 지속되며 농담도 점차 줄어갔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약 10cm 정도였다.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부터의 불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의 여기저기를 긁고 싶고 어디든 탁 트인 곳으로 나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싶었다. 굳게 닫힌 해치의 잠망경 틈으로 풀과 하늘이 보였다. 그 얇고 긴 유리창으로 바라본 풍경은 희망처럼 빛났지만, 이룰 수 없는 희망이 고문이듯 나를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 나는 해치를 두드렸다. 해치를 여는 손잡이가 의자 옆에 있음을 알면서도 나가고 싶어 해치를 두드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2시간? 3시간? 체감상 반나절은 그 좁은 조종수석에 갇혀있었던 것 같다. MOPP4단계가 해제되자마자 해치를 열고 뛰쳐나가 바깥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 뒤로 좁고 밀폐된 공간을 기피하게 되었다. 


 그날 밤, 컨디션 보호를 위해 조종수들만 정비반 T형 텐트에서 취침했다. 정비반 텐트는 넓고 쾌적했다. 깔판 위에 흙투성이 전투복째로 몸을 누이고, 베레모와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잠에 들었다. 풀벌레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쌔애액-쾅!'

'사망.'

'부상.'

 전갈부대라 불리는 적군은 노련했다. 텐트를 펼칠만한 야지가 몇 없는 것을 아는 그들은 새벽을 틈타 야지에 집중포격을 전개한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정비반 대다수가 사망에 이르렀고, 그들은 안치실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정비반의 후임병 차상병과 나는 두돈반 차량에 실려 의무대로 후송되고 있었다. 나는 대퇴부 관통상이었고, 차상병은 어깨 관통상이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채 잠그지 못한 턱끈을 채우고, 마후라를 코까지 덮어썼다. 밤공기가 싸늘했다. 추위를 물리칠 심산으로 보급관님께 농을 치기 시작했다. 갖은 훈련을 겪은 보급관님은 이런 상황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특유의 붉은 코끝을 비비며 내 농을 받아주었다. 그때였다.

'쌔애액-쾅!'

 새벽잠을 깨운 소리와 동일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상태창에선 지속적으로 "사망.", "사망." 소리가 들려왔다. 두돈반은 반파, 차상병과 나는 완파였다. 안치실은 정비반 텐트 규모의 추운 천막이었다. 차가운 흙바닥에 시체가방을 두 줄로 나란히 늘어놓았다. 차상병과 나는 지시에 따라 시체가방 안에 들어갔다. 곧이어 군종병이 멀리서부터 차례로 걸어오며 시체가방 위로 태극기를 덮어주었다. 21세의 군인에서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죽음에 이른 어린 영혼들을 구원해 달라는 내용의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고 찬송가가 장내를 채웠다. 시체가 되는 것은 이토록 평화롭게 변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찬송가가 끝난 후 안치실 밖에 일렬로 집합했다. 그곳에서 진행요원 간부가 상태창을 조작하여 사망상태를 생존으로 돌려놓았다. 사망자들은 훈련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규칙이지만, 준비된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의 합의하에 같은 수의 장병을 부활시키기로 한 것이다. 생존으로의 상태 전환을 마친 차상병과 내가 부대방향으로 복귀하려던 때, 어느 간부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았다.  “너희는 지금부터 이기자 부대에 편입되어 적진에 투입된다.”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를 한 무리에 몰아넣은 간부는 다짜고짜 무리를 향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이기자 부대는 포기를 모른다’는 내용의 연설을 마치고, 오른손을 90도로 꺾어 들어 주먹바닥을 보이더니, “구호준비!”라 외쳤다. 차상병과 나는 서로의 얼굴에 비친 당황스러움을 읽었다. “악! 이기자 이기자 이기자 앗!” 우리가 속한 무리는 당황한 기색 없이 힘차게 외쳤다. 차상병과 나를 제외하고.

 우리는 어느 한적한 천막으로 이동하여 줄곧 대기했다. 차상병과 나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그곳에는 난로도 없었고, 버려지듯 방치된 파렛트 몇 개만이 한편에 쌓여있었다. 그나마 파렛트에 몸을 기댈 수 있는 것이 행운이었다. 파렛트 주변을 차지 못한 장병들은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흙바닥에 서있어야 했다. “여기서 얼어 죽으면 누가 책임지는 거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젠장, 이건 정말 인권유린 아니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춥습니다.” “잠들지 마라, 잠들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네 알겠습니다.” 차상병과 나는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핫팩 한 개를 가지고 서로 주고받으며 체온을 유지했다. 천막의 야트막이 벌어진 입구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이 튼 것이다. 밤새 작업에 열중하던 사람이 아침 햇살에 비로소 피로를 알아채듯, 쌓였던 피로가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집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두돈반 트럭에 실려 산의 골짜기에 내려졌다. 보병전술에 능한 이기자 부대원들은 두돈반에서 내리는 즉시 길의 좌우로 산개하여 엎드린 후 경계태세를 취했다. 이윽고 부소대장의 수신호에 따라 간격을 두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산을 척척 오르는 부대원과 달리 차상병과 나는 여간 익숙지 않았다. 뒤질세라 나무뿌리를 잡고 기듯이 따라 올랐다. 이윽고 산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앞서가던 부소대장이 정지 수신호를 보내왔다. 차상병과 나는 풀숲에 은신하여 반대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풀숲은 축축했다. 이슬이 전투복에 스며들어 온기를 앗아갔다. 우리 편이 이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적군과의 정면승부가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차상병과 나는 다만 어서 빨리 전투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스무 발자국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부소대장은 1시간 가까이를 미동도 않은 채 엎드려 저격스코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소대장 옆에 있던 통신병의 RT에서 "상황 종료." "상황 종료."라는 무전이 들려왔다. 드디어 훈련이 끝난 것이다. 전갈부대보다 무시무시한 추위와의 전투가 드디어 끝났다. 올라올 때보다 힘든 하산길을 내려오니 뒤편 길에서 전차부대의 땅울림이 몰려오고 있었다. 참기름 향수를 도포한 132호 전차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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