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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Sep 06. 2024

유럽에서 마주한 찰나를 떠올리며

 요즘같이 청량한 하늘 아래엔 핑크빛 노을이 허리천처럼 덧대어져 일렁인다. 9년 전, 지금의 아내와 함께 떠났던 유럽의 여느 도시에서 마주친 풍경과 자못 닮았다. 우리는 방학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여 모든 돈을 가지고 34박 36일간 유럽을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처음 도착한 곳은 런던이었다. 히드로공항에서 내려 숙소까지 튜브(영국의 지하철)를 타고 이동할 때였다. 오래된 지하철 역이 으레 그렇듯이, 런던의 지하철역은 온통 계단이었다. 우리는 30인치 캐리어를 각자 하나씩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마주한 드높은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여자친구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기엔 무리였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 꾀를 내었다. 우선은 내 캐리어를 꼭대기에 올려다 두고, 서로 위치를 교대하여 여자친구가 위에서 캐리어를 지키는 동안 내가 아래에서 여자친구의 캐리어를 갖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꼭대기에다 캐리어를 올려둔 나는 계단을 뛰어내려 갔는데, 여자친구가 한 영국인 청년과 나란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다가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캐리어를 올리는 동안 영국인 청년이 다가와 캐리어를 들어줘도 되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여자친구는 내가 저 위에 있다고 답하였으나, 그럼 기다렸다가 남자친구가 허락하면 도와주겠다며 계단 아래에 멀거니 서있던 것이었다. 내가 그래주면 감사하겠다고 하자 그는 캐리어를 번쩍 들어 위까지 옮겨주고서 손을 흔들며 떠났다. 후에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싶어 "For free?"라고 물은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역시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맞았다며 잔뜩 신나 했었다.

 다음날, 런던의 명소 빅벤으로 가는 길거리에서 한 삐에로를 만났다. 그는 맞은편에서 말 대신 삑삑 소리를 내는 비닐혓바닥을 불며 다가왔다. 뜻밖의 이벤트에 우리는 당황하면서도 다소간 들떴다. 그는 우리의 사진기를 가져가 함께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여러 포즈를 취하고 깔깔대며 사진을 찍은 뒤에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가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돈을 줄 수 없다는 우리의 항의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끈질기게 돈을 요구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싫었던 우리는 20파운드를 내주고야 말았다. 여자친구는 그 불쾌함을 금방 떨쳐버렸으나, 나는 쉽사리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삐에로가 찍힌 사진을 모두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분노 앞에서 무기력하게 끓어올랐다. 결국 해가 저물고서야 순간의 불씨에 하루를 통째로 불살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20유로보다 훨씬 값진 런던에서의 하루를, 더군다나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하는 행운을 스스로 불태운 것이다.

 이후에도 우리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브뤼셀의 광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Good bye의 한국어를 물어 서툰 발음으로 "좔가요."라며 떠나던 유쾌한 이들. 파리의 기차역에서 우리에게 접근해 기부 명단에 서명하라며 흔해빠진 갈취를 시도하던 두 여인. 프라하에서 길을 헤매던 중 자연스레 다가와 길을 함께 찾아주던 어리숙한 청년. 우리는 숱하게 좋은 사람을 마주하고, 또 그만큼 나쁜 사람도 마주했다. 좋은 사람을 마주한 도시는 좋은 기억으로 남고, 나쁜 사람을 마주친 장소는 나쁜 장소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생각도 조금 바뀌어감을 느낀다.

 불교에는 찰나라는 말이 있다. 이는 0.013초의 아주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와 반대로 겁이라는 말은 100년에 한 번씩 선녀가 내려와 바위를 스치는데,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아주 긴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옷깃을 스치려면 500겁의 시간이 든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여행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들은 모두 500겁의 긴 시간을 거쳐 내게로 다가와 찰나처럼 스쳐간 것이다. 모두 엄청난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 순간 우리가 점유했던 공간엔 금세 다른 이들이 채워졌을 것이고, 또 다른 우연한 만남을 이어갔을 것이다. 고작 몇 초, 몇 분, 몇 걸음의 차이로 나와 그들은 전혀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반대로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마주할 가능성도 다분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도시에서 머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이 어떠했는가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의 성격을 대변할 수는 없다. 나는 여태껏 빅벤 앞 거리를 미워했고, 파리 북역의 어수선함과 우중충함, 그곳에 기거하는 갈취꾼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미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방문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를 스쳐간 찰나를 잊고, 새로이 다가올 친절한 찰나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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