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소개팅 장소를 잠실로 하자는 이야기에 설렘이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의 잠실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출판사를 다니던 친구가 해준 소개팅이라 기대가 매우 컸다. 출판사에는 여직원의 비율이 높기도 했지만 친구가 다니는 회사는 유독 예쁘장한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해 준다는 여성도 같은 회사에 다니는 편집자라고 했다. 출판사 편집일을 하는 여성이라니 왠지 지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분이 나올 거라는 기대가 절로 되었다.
초겨울이었을 거다. 살짝 추운 느낌은 있었지만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약속 장소도 석촌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만나기도 전부터 들뜨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잘해보자는 각오를 다질만했다. 장소도 분위기도 최고였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검은 스타킹에 회색 코트를 입은 날씬한 모습의 그녀는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출판사에 다녀서 그런지 지적인 느낌이 풍겨왔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잘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이러한 기대는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것은 그녀의 이상형이었다.
그녀의 이상형은 건물주라고 했다. 대놓고 건물주라고 강조를 할 정도였으니 비빌 건더기조차 없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삶을 위해서는 건물주를 만나야 한다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너는 건물주가 아니니 탈락!이라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는 없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뭔가 사연이 있으니 그런 야망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K대를 나온 재원이기도 했다. 외모도 좋은 편이라 그동안 많은 대시를 받았던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나는 내게 술술 이야기를 했던 것을 보면 난 아예 첫인상에서 낙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남자들을 만나면서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외모를 따지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눈을 낮춘 결과일 것이다. 부와 외모를 모두 갖기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속으로는 건물주가 미쳤다고 당신을 만나겠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여기서 싸워봤자 내게 득이 될 것은 1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녀의 바람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상상은 자유니까. 그녀가 건물주를 만나는 것을 꿈꾼다고 해서 죄는 아니다.
그녀는 과연 원하던 건물주를 만났을까? 아니면 눈을 좀 더 낮춰서 현실적인 타협을 했을까? 이후로는 소식을 들은 바가 없어서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안쓰러운 것은 남자에게 의지를 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본인이 건물주가 되려는 생각은 안 해 본 걸까? 그 나이였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나이였을 텐데... 난 건물주도 아니고 재벌 2세도 아니어서 그녀의 어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아쉬운 마음은 없다. 사람은 각자의 길이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