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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쟁이인가?

소개팅 필패의 역사

by 검마사

신기한 일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소개팅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이쯤 되면 내가 마치 소개팅을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이번 케이스는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케이스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소개하려고 소개팅에 나왔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귀한 시간을 내서 소개팅 자리에 나왔는데 남을 소개해 주라고 나왔다고? 직업이 뚜쟁이가 아닌 이상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했다.


시작은 여느 소개팅과 같았다. 아니지 분위기는 평소보다 좋은 편이었다. 이야기도 잘했고 애프터도 어렵지 않게 받아냈으니 말이다. 멀리 수원까지 가긴 했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소개팅이었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수원성 주변을 걸었다. 수원성을 구경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까지만 보면 첫 만남치고 아주 잘된 소개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헤어진 것도 아니고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까지 나눴으니 말이다.


첫 만남 이후로도 좋은 분위기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연락을 해도 씹히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전화도 잘 받고 메시지에 대한 답도 늦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이쯤 되면 핑크빛 환상에 젖을 만도 했다. 내가 판단하기에 좋은 징조들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이쯤 해서 소개팅 상대를 간단히 소개해 보겠다. 그녀는 수원에 거주하는 아가씨였다. 일반 회사에 경리로 근무하는 아가씨였는데 수달이 소개였다. 딱히 이상한 점도 없었고 이야기도 잘 됐으니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점쟁이가 아닌 이상은 잘 될 거라는 상상을 할 만한 상황이었다.


늘 그렇지만 안 좋은 일은 잘 나갈 때 일어나기 마련이다. 시작은 두 번째 만남부터였다. 첫 만남과는 달리 다시 만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약속 날이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약속 날짜와 시간을 바꿔야만 했다. 여기까지는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했다. 돌발적인 변수는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이 되다 보니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락이 잘 되다가도 약속 날만 되면 이런저런 핑계로 만나는 것을 미뤘으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은 여기서 눈치를 채여만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상황이다. 만나기로 했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욕실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얼른 병원에 모시고 가라고 했다. 당연히 그날은 못 보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만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만나자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것도 이해할만했다. 그런데 다음에는 할아버지 제사라고 못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부터 싸한 느낌이 들었다. 매년 지내는 제사를 까먹을 수가 있을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어느덧 에프터는 하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채여만 했다. 그녀는 나와 볼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멍청하기만 했다. 상대가 싫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끈기는 이럴 때 써서는 안 되는 것인데 여기서 끈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한 심한 일인가? 돌이켜 보면 아까운 시간만 낭비만 셈이다. 결국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연락은 계속되긴 했는데 만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을 때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친구를 만나보라는 것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가? 그런데 과거의 나는 참으로 성격이 좋았나 보다. 그걸 또 좋다고 만난다고 했다.


아마도 여기서 그녀도 당황했을 것이다. 연락처를 나중에 준다고 하더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거절도 참 희한하게 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만나기 싫으면 그만 보자고 하면 될 것을 뭘 그리 돌려가면서 말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애꿎은 가족들을 끌어들여서 핑계를 대야만 했을까? 오죽 답답했으면 친구까지 끌어들였나 싶기도 하다. 이쯤 되면 알아서 포기하리라 생각했나 보다. 그녀는 날 잘 몰랐던 것이다. 싫다는 말을 하면 미련을 버리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우직하게 기다리는 끈기를 몰랐던 것이다. 끈기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번에는 상대를 잘 못 판단하고 말았다. 진작에 미련을 버렸어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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