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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녀

소개팅 필패의 역사

by 검마사

이번에 소개할 그녀는 무려 10년이 넘게 만난 아가씨다. 이쯤 되면 사귀었던 것이 아니냐고?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같은 직장,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주 본 것뿐이다. 집이 가깝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았었다. 같은 직장에 있을 때 호감을 품고 고백을 했다가 단번에 차였을 때는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사는 곳이 가깝다 보니 인연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고백을 했을 때 단번에 차이기는 했지만 그녀도 아주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이후로도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렸으니까. 여러 사람과 어울릴 때뿐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둘이 보기도 했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니 조금씩 정이 들게 되었다. 같이 자전거도 타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이게 그냥 아는 사이인지 친구 사이인지 가끔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실 이 정도 만나면 사귀어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항상 선을 지켜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려고 하면 그녀가 멀찍이 뒤로 물러났으니 말이다. 나는 썸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이렇게 애매한 관계가 7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까워질 때도 있었고 다시 고백을 할까라고 생각이 드는 시점도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그녀는 나를 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부르기 편해서란다. 따로 만나는 이성 친구가 없던 시절이라 자주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뭐라 부르던 상관은 없었다. 이 것이 나와의 거리를 두기 위한 호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뒤로 한참만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흔한 어장관리녀는 아니었다. 애초에 나를 어장에 넣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사귀는 남자 친구 이야기를 대놓고 할 정도였으니까. 이쁘장한 그녀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항상 남자친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주기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어장 관리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내게는 철저히 선을 긋는 바람에 그 흔한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썸인 듯 아닌 듯 묘한 관계가 계속 이어질 뿐이었다.


딱 한번 기회가 온 적은 있었다. 때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마침 그녀가 남자친구가 없던 상황이었다. 늘 있던 남자 친구가 없다 보니 크리스마스에 심심했던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나온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여서 그런지 풀세팅을 하고 나온 그녀는 평소보다 이뻐 보였다. 때가 때인지라 분위기도 좋아서 기분이 함께 업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가도 된다는 말을 했다. 밤새 놀고 싶다는 것이다.


'이거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그녀와 가까워질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야기도 어찌나 잘 되던지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이 날만큼은 밤새 불태울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망할 놈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자정이 다되어갈 즈음에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녀의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통화를 마친 그녀의 표정이 심각했다. 친한 친구가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힘들다고 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잡아야 했을까? 아니면 함께 가자고 해야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만나고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야 했을까?


내 선택은 쿨하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다음에도 또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것이 문제였다. 이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한 번 떠난 기회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남녀 사이에서는 떠나간 기회는 그걸로 끝이다.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망할 놈의 친구는 그 이후에 관계를 회복해서 결혼하고 잘 산다고 한다.


오늘 제목이 거절녀인 이유는 크리스마스이브 때를 제외하고는 내 고백을 늘 거절했기 때문이다. 7년이나 알고 지냈으니 그 사이에 많은 고백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주 보게 되니 나에게 호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성탄절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내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녀와의 사이도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사귀던 남자 친구가 유부남이라서 사기 결혼 비슷한 것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상대가 유부남이었다니 그녀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 싶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 머리도 짧게 깎고 일만 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다니는 직장도 달랐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좋았던 기억도 많았던 그녀였지만 마지막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지금은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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